엔화 가치 급락으로 늘어난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다시 엔저(底)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에 일본 정부가 긴장하고 있다. 달러당 120엔대의 엔화 약세가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일본 정부가 24년 만에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30일 일본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는 121엔대 후반에서 움직였다. 지난 28일 엔화 환율이 6년7개월 만의 최고치인 125.1엔까지 치솟은(엔화 가치 하락) 이후 계속 120엔을 웃돌고 있다. 금리 상승 억제에 엔화 급락
엔화 급락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과 일본 중앙은행의 상반된 금융정책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급등하는 물가와 싸우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행은 금리를 낮추기 위한 강경책을 동원했다.
29~31일 일본은행은 10년 만기 국채를 연 0.25% 금리에 무제한 매입하는 공개시장운영을 한다. 금리가 연 0.25%를 웃도는 거래의 수요 자체를 말려버림으로써 장기 금리를 일본은행 목표치인 연 0.25% 이하로 묶어두려는 정책이다.
미리 지정한 가격에 국채를 사흘 연속 무제한 사들이는 연속 공개시장운영은 사상 처음이다. 미국은 금리 인상을 서두르는데 일본은 거꾸로 금리 상승을 억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자 달러 가치는 급등하고 엔화 가치는 급락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일부 수출 대기업과 해외 자산을 보유한 부유층만 엔화 약세의 혜택을 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 기업의 99.5%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기업과 대다수 일본인은 수입물가 급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이 출구전략을 찾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미국 유럽과 달리 물가 상승이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일본에서 섣부른 금리 인상은 경기를 급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엔화 환율이 달러당 120엔대로 굳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과 니혼게이자이연구센터에 따르면 경상수지와 교역조건 등을 반영한 엔화의 이론상 환율은 2021년 3분기 달러당 105.4엔에서 지난달 121.7엔으로 16엔 급등했다.
투기세력의 매매 동향과 국제 정세까지 반영하는 실제 환율은 이론상 환율과 5~10엔가량 차이가 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문에 니혼게이자이연구센터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3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총리가 엔저 대책 지시일본 기업이 엔고(高)를 피해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한 2010년 이후 일본은 무역수지 흑자가 줄고 자본수지 흑자가 늘어나는 구도가 정착됐다. 무역수지에 반영되는 수출이 줄어든 반면 자본수지로 잡히는 해외 자산의 배당·이자 소득이 늘었기 때문이다. 자본수지 흑자가 증가한 덕분에 무역수지와 자본수지를 합한 경상수지는 흑자를 이어왔다.
하지만 원자재값 급등으로 수입이 크게 늘면서 지난 1월 일본의 경상수지는 1조1887억엔 적자를 나타냈다. 올해 일본의 경상수지가 연간 기준으로 40여년 만에 처음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환시장은 경상수지 악화가 엔화 매도를 부추기고, 이것이 다시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일본은행의 발목이 묶인 상황에서 정부가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 일본 재무성이 마지막으로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들여 환율에 직접 개입한 것은 1998년 6월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전날 관계장관들을 소집해 엔화 가치 급락과 물가 상승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최소 5조엔(약 50조원) 규모의 추가 경제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