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태리는 '스물다섯 스물하나' 나희도 그 자체였다. 그는 "세상에 그런 완벽한 아이는 없다"며 "드라마로나마 내가 연기할 수 있어 진심으로 영광이라 생각한다"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김태리는 이번 캐릭터에 대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크게 드는 인물이라고 강조, 또 강조했다.
김태리는 2016년 1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통해 혜성 같이 데뷔했다. 이후 영화 '1987', '리틀 포레스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 넷플릭스 '승리호'(2020) 등에 출연하며 매번 호평받아 왔다. 이어 선택한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1998년 IMF 그 후, '시대에 꿈을 빼앗긴' 청춘들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드라마로 지난 4일 유종의 미를 거뒀다. 전국 가구 기준 평균 11.5%, 최고 13.7%를 기록하며 전채널 시청률 1위로 마무리 했다.
김태리는 이 작품에서 IMF로 팀이 없어졌지만, 포기를 모르는 당찬 고등학교 펜싱 꿈나무에서 국가대표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성장하는 나희도 역을 연기했다. 나희도는 IMF로 풍비박산 나버린 집안의 장남으로 억척스럽게 살아가다 방송사 기자가 된 백이진(남주혁)과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청춘'을 보낸다.
많은 시청자가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그린 청춘에 공감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발랄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그런 드라마를 목말라 해주신 것 같아요. 초록초록한 여름의 느낌으로 시작해서 힐링 되는 지점들이 있죠. 인물들도 살아 움직이고요. 눈을 깜빡할 수 없게 '어머, 쟤 봐' 하는 그런 점들을 재밌게 봐주신 것 같아요."
MZ세대인 김태리에게 90년대 후반의 삶을 연기해보니 어떤지 물었다. 그는 "'작금은 낭만의 시대라 하오'라는 '미스터 션샤인' 속 애신의 대사가 생각이 난다"며 "낭만적인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눈을 반짝였다.
드라마는 나희도와 백이진이 열여덟, 스물둘인 시절 시작해 열아홉, 스물셋까지의 이야기가 무려 12회까지 펼쳐진다. 이후 총 4회 분량에서야 스물과 스물넷, 스물하나와 스물다섯의 이야기가 그려졌다.
김태리는 희도의 교복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는 "30살이 넘어서 교복을 입었는데 너무 좋았다. 저 고등학교 때 교복은 못생겼는데 희도 교복은 예뻤기 때문"이라며 "교복을 입고 활동하는 것 자체만으로 희도라는 캐릭터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컸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나희도와 백이진의 관계가 미성년자와 성인의 연애를 미화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캐릭터 진행 방향에 대해 김태리는 "알고 들어갔다"고 답했다. 그는 "작가, 감독, 배우와 많이 고민하고 들어간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10대와 20대, 희도의 성장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고심했다고.
"어느 지점부터 바뀌어야 하나, 달라져야 하나 아주 어려웠어요. 그런 생각에 갇히다 보면 '이게 희도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때 남주혁이 많이 얘기해줬어요. 나이가 든다고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고. 맞아요, 저도 그래요. 나이가 들면서 많은 부분은 변했지만 큰 줄기는 변하지 않듯이 말이죠. 희도가 가진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다가갔어요.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연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체득됐죠."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로맨스의 외피를 썼지만, 여성 캐릭터의 성장이 중심에 있다. 김태리는 나희도의 밝은 면에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작품을 선택했다고 고백했다.
"희도는 현실에 발붙인 아이 같지 않아요. 세상에 그런 아이는 없죠. 너무 완벽해요. 희도는 애써 만들어 내지 않아도 너무 빛나는 아이죠. 솔직하고 당당하고 구김살 없고 자격지심이라곤 하나 없는 아이. 처음에 모든 회차를 다 보고 들어간 게 아니라 희도의 아픔, 트라우마까지 보지 못한 상태였어요. 밝은 면에 매료됐죠."
나희도의 트레이드마크 꼬불꼬불 퍼머머리는 김태리의 아이디어였다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라고 스스로를 칭찬했어요. 초반의 희도는 머리, 옷, 많은 것에 제 의견이 반영됐고 그 중 머리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노멀피플'이란 드라마를 봤는데 여주인공 고등학생 때 머리가 엄청 엉클어져 있더라고요. 제 머리는 너무나 심한 말총머리인데, 그런 머리가 주는 캐릭터 성을 연기하고 싶었죠."
이 드라마는 김태리와 로맨스 호흡을 맞춘 남주혁부터 보나, 최현욱, 이주명까지 또래 배우들의 면면이 대중에게 호감으로 작용했다. 특히 김태리는 남주혁에 대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정말 위트있는 사람 같아요. 순간의 감정에 다운되는 법이 없어요. 항상 에너지를 끌어내려고 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스탠스를 유지해요. 연기할 때도 어디서든 유머러스함을 유지하려고 하더라고요. 배우로서 너무 배울 점이 많았고,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기응변도 되게 뛰어난 친구라 함께 연기하며 재밌었어요."
그동안 촬영 현장에서 막내 자리를 독차지한 김태리는 이번 작품 속에선 가장 연장자였다고 토로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전 늘 막내였고, 언니나 오빠가, 선배가 계셨고 저는 '네, 네' 하며 수저 놔드리고 물 따라 드리면 됐는데 세상에 제가 '맏이'라는 거예요. 거기다 현욱이랑은 나이 차이도 상당해! 거기다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라 너무 친해야 할 것 같아서 초반엔 친해지려고 혼자서 노력 많이 했어요."
김태리의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고. 그는 "배우들이 캐릭터에 녹아들면서 날이 갈수록 엄청나게 친해졌다. 내가 억지로 만들려고 했던 것들이 패착이란 걸 알았다. 다음부턴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굳이 하려 하지 않아도 케미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스포츠 드라마만큼의 애정을 들여 펜싱 장면을 촬영했다. 김태리, 보나도 펜싱 국가대표 연기를 위해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며 담금질했다고 알려졌다. 김태리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진짜 몸이 바스러지게 노력했어요."
"펜싱은 희도에게 너무 소중한,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었어요. 보여주기식으로 콘셉트 중의 하나로 끝나지 않았으면 했고, 제대로 소개하고 싶었죠. 펜싱을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임했고 몸이 많이 아파요. 아픈 만큼 건강해진 것 같고요."
김태리는 펜싱의 매력에 흠뻑 빠진 상태였다. 그는 "이렇게 재미있고 매력이 많은 스포츠를 왜 이렇게 늦게 알았나 싶을 정도"라며 "연습하는 내내 '너무 힘들어. 왜 해야 해. 죽지 못해 한다'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쓴 권도은 작가에게 펜싱을 알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올림픽 하는데 막 대단한 기술, 저는 절대 할 수 없는 스킬들이 나오면 저는 알고 보는 거죠. 근데 주변은 아무도 몰라요. 하하. 나만 알고 보는 그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김태리가 가장 인상적으로 꼽은 신은 2부 엔딩, 수돗가 분수 신이다. "정말 너무 사랑하는 신이죠. 연기를 하는데 너무 떨었어요. 희도는 너무 자유로운데 저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고요. 주혁이한테도 너무 떨린다고 했어요. 전 이 신은 남주혁이 다 살렸다고 봐요. 정말 잘 해줘서 이렇게 아름답게 나올 수 있었어요. 희도는 다 필요 없고 이진이가 희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했죠. 희도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느껴져야 하는데 백이진이 그걸 한 거예요. 남주혁 최고!"
결말에 대해 김태리는 "모두에게 첫사랑은 있지만 저는 그런 첫사랑이 없었기에 판타지 같았다"며 "첫사랑 하면 넣을 수 있는 모든 게 들어간 느낌이다. 아련한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지금 당장 현실처럼 보이는 것 같아 너무 슬폈다"고 밝혔다. 첫사랑에 대한 질문에 김태리는 눈동자를 굴렸다. "첫사랑은 말씀드리기 싫어요. 잘 기억도 안 나요. 물론 거짓말이지만…몰라요. 희도 같지는 않았어요."
김태리는 자신이 표현한 희도에 대해 몇점을 주고 싶냐는 질문에 "50점"이라고 했다. "저는 50점이지만 희도는 100점 만점에 120점짜리 아이예요. 희도한테 미안해서 울 것 같은데…희도는 자유로운 아이라 스스로 제한을 둘 필요가 없던 인물이죠. 제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표현해도 상관없는 인물입니다. '나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어!' 연기하는 즐거움이 너무 컸고, 에너지를 많이 받았어요."
드라마 시청자들은 김태리 아닌 희도는 상상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트위터 사용자는 "김태리는 매번 누군가의 진흙 같은 인생에서 진주 같은 구원자가 되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평가하기도 했다.
"'구원자'란 단어는 '아가씨'에서 나왔던 단어 같아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너무 좋은 말이고,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나마 어떤 분들의 행복의 순간을 드릴 수 있어 저 또한 행복해요. 이 드라마를 하며 지인들에게 연락받을 때 늘 '네, 당신을 행복하게 했다면 됐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고민했던 모든 순간이 보상되는 기분이에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전 그걸로 된 거 같아요. 너무 행복해요."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