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1882~1945)만큼 근래 한국 정치권에서 많이 회자된 인물도 없다. 물론 대부분 여권에서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주당 20년 집권론’이 나온 발단이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롤모델”이라며 미국 방문 때 그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20세기 전반기 미국 사회의 주류를 진보로 교체한 데 대한 찬사다. 이재명 전 민주당 대선 후보는 한술 더 떴다. 민주당이 루스벨트의 강력한 사회주의 정책 드라이브를 본받아 대선에 나선 자신을 적극 지원해달라고 외쳤다. '진영논리 원조' 해악이 크다루스벨트에 대해선 정반대 평가도 많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 미국 민주주의를 희생시켰다는 게 골자다. 장기집권 위험을 막기 위해 오래도록 지켜져 온 대통령 임기 전통(재선까지 허용)을 처음이자 유일하게 깬 사람이 바로 루스벨트(4선)다. 2차대전 등 위기 국면이 지난 뒤인 1952년 수정헌법 22조가 추가돼 대통령 3선 제한이 명문화됐다. 반대파들이 ‘대법원 재구성 계획’이라고 비판한 시도도 있었다. 루스벨트는 대법원 판사 수를 명시하지 않은 미 헌법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70세 이상 대법원 판사 수만큼 새로 판사를 임명하고, 최대 15명까지 늘리자고 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요즘 식으로 말하면 현직 대통령의 ‘사법부 장악’ 시도다.
극단주의의 등장을 경계한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레비츠키·지블랫 공저)에서도 제도적으로 가능한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력’이 중요하다며 루스벨트 예를 들었다. 헌법 조문만으로는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어려우며, 불문율이라 하더라도 최상위 정치 규범은 존중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는 전대미문의 신구(新舊) 권력 갈등이 벌어진 한국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선거에서 석패(惜敗)했다고 해도 물러나는 정권이 법 형식논리만 따지고 인사권 등이 아직 자기들에게 있다고 강변한 것은 민주주의 전통과 원리에 맞지 않는다. 그제 ‘문-윤 회동’의 성과로 갈등 해소의 전기는 마련됐지만, 언제든 다시 불붙을 위험성이 다분하다. 다수파 책임의식 가질 때민주당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부인 등의 비리 의혹 수사를 위해 특검법안을 제출한 것이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완료를 주장하는 것도 차기 정부를 존중하는 자세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 172석 속에 튼튼한 진지를 구축하고, 진영을 향해 투쟁하자고 선동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정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가 대체 어디서 비롯됐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힌트는 문 대통령의 지난 3·1절 기념사 속에 있다. 현 정부를 ‘민주정부 3기’라고 지칭한 게 그것이다. 문재인 정부 사람들은 아직도 세상을 ‘민주 대 반(反)민주’ 대결 구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제 민주화 임무가 완수됐다며 여권 유력인사가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대부분은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기득권 세력은 강력하고 민주 세력은 여전히 ‘소수파’라는 의식에 아직 갇혀 있다. 지난번 총선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대선에서 40~50대 지지세를 확인했음에도 변함이 없다. 그러니 타협이나 협상은 설 자리가 없고, 오로지 투쟁만 있을 뿐이다.
이래서는 소수여당이 먼저 팔을 뻗어도 협치(協治)는 언감생심이다. 합법을 빙자한 극단과 대결로 치달을 공산이 적지 않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기초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민주당도 자신들의 진지에서 나와야 한다. 동시에 루스벨트에 대한 환상에서도 깨어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