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에 멈춰 있던 ‘산업통상자원부 블랙리스트 수사’의 시계가 35개월 만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정책 실패 중 하나면서 이미 각종 민형사 소송이 제기된 탈원전 정책과 직접 맞닿아 있는 수사다. 정치권과 관가에서는 ‘하필이면 이 시점에 검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를 놓고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수사 전개 과정에 따라 임기가 1개월여 남은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겨냥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산업부 블랙리스트 뭐길래
산업부 블랙리스트는 남동·남부·서부·중부발전의 사장을 2017년 9월 정부가 일괄 교체하면서 나온 말이다. 사장들의 임기가 1년4개월~2년2개월 남아 있던 시점에서다. 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던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장과 산하 4개 국장을 모두 경질·교체한 직후였다. 야당인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정부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을 없애기 위해 인사권을 남용했다”며 2019년 1월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이후 검찰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2019년 5월 장재원 전 남동발전 사장 등을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2019년 5월 검사 수사 완료, 2021년 2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징역형 선고 등으로 신속히 마무리된 것과 대비된다. 이 같은 수사 속도의 차이는 사안과 청와대 사이의 거리에 좌우됐다는 분석이다. 단순히 전 정부에서 임명한 산하기관장의 사표를 받은 환경부 블랙리스트와 달리 산업부 건은 청와대에서 직접 챙기는 탈원전 정책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2019년 당시 야당의 고발장에는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과 당시 차관이던 이인호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과장급 실무자 두 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하지만 수사 전개 과정에 따라 청와대의 관련 내용 지시 여부가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 백 전 장관 등 7명을 검찰이 기소한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과 함께 문 대통령과 청와대에 큰 부담을 줄 수 있다. 수사 어디까지 확대되나여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검찰의 압수수색을 1961년 5·16 쿠데타에 비교했다. 그는 “칼끝이 문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는 ‘윤석열 사단’의 작품”이라며 “저강도 쿠데타가 시작된 첫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 및 공기업 등에서는 “진작에 이뤄졌어야 할 수사가 이제야 가능해졌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한 발전사 관계자는 “인사권이 남용된 발전공기업들의 규모가 환경부 블랙리스트 대상 공기업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다”며 “탈원전이라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빚어진 만큼 일찍부터 검찰의 적극적인 수사가 필요했던 사안”이라고 말했다.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에 산업부 블랙리스트까지 더해지며 차기 정부에서 탈원전 관련 검찰 수사는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일찍부터 자신의 정치 입문 계기를 탈원전 수사 방해로 언급한 바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직후인 지난해 7월 그는 “검찰총장을 그만둔 것이 월성 원전 사건 처리와 직접 관련이 있다”며 “대전지검에 관련 압수수색을 지휘하자마자 나에 대한 감찰 및 징계 청구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한 야권 관계자는 “청와대가 무리하게 문 대통령 임기 내에 감사원 감사위원을 선임하려는 것도 탈원전에 대한 부담 때문으로 보고 있다”며 “탈원전 정책 과정의 각종 문제는 감사원 감사 이전에 검찰 수사로 상당부분 밝혀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경목/정의진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