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이 현금성 자산을 역대 최대 규모로 늘리고 있다. 금리 상승으로 이자 부담이 커지는데도 빚을 더 내 ‘비상 현금’ 확보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금리인상기를 맞아 미리 신(新)산업 투자자금과 운전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면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날로 심해지는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이 더 큰 원인이란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표기업 50곳(시가총액 상위)의 현금성 자산은 작년 말 기준 약 149조원으로, 전년보다 23.4% 늘어났다. 2019년 말과 비교하면 56.6% 급증했다. 이익유보금을 늘리고 부동산은 매각하며 채권 발행·금융 차입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결과다. 심지어 대규모 투자를 하더라도 재무적 투자자(FI)를 찾는 식으로 최대한 현금을 아끼고 있다는 전언이다.
문제는 현금성 자산이 늘수록 기업 내부에는 사실상 무수익 자산이 쌓여간다는 점이다. 기업 자금은 계속 재투자되고 회전돼야 마땅한데, 이렇게 비상금을 쟁여놓아선 기업이 수익성을 높이고 일자리를 늘리기 어렵다. 그 해법을 기업에만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급망 차질, 에너지·원자재 가격 급등, 스태그플레이션 징후, 우크라이나 전쟁 등 악재가 꼬리를 물고 있어 기업으로선 현금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IT(정보기술) 대기업에서 시작된 임금 인상 도미노도 기업의 자금운용 압박 요인이다.
결국 기업 자금이 수익성 높은 곳으로 마음껏 투자될 수 있도록 정부가 판을 바꿔주는 노력이 긴요하다. 전경련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한국 기업의 인수합병(M&A) 금액은 선진 5개국 평균의 25%에 불과했다. 이런 위축된 기조를 반전시켜야 할 때다. 기업에 채워진 각종 규제 족쇄를 푸는 노력 없이는 우리 경제는 돈이 돌지 않는 꽉 막힌 ‘병목 경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경제 6단체장을 만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기업활동 방해 요소 없애겠다” “월급 주는 사람 입장도 이해하고 존중하겠다”고 한 말이 그저 덕담에 그쳐선 안 될 것이다.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중대재해처벌법 개선, 노동·고용시장 유연성 제고 등 노동개혁, 새로운 민·관 협력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4500조원을 넘긴 민간 부채 문제도 함께 풀 선(善)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