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3월 22일 21:26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얼굴에 로션조차 바르지 않는다는 미국 남성들 비중이 얼마나 될까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로션 정도는 다들 바르고 사는 것 아닌가? 뉴트로지나(존슨앤드존슨의 대중적인 화장품 브랜드)도 안 바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어림짐작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생각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 일단 로션조차 바르지 않으면 얼굴이 당길 텐데, 우리 아버지 세대도 로션은 쓰지 않나? 외계인인가?
남성용 화장품을 만드는 카돈(Cardon)의 정나래 대표(사진)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목소리 톤도 높아졌다. “카돈 홈페이지에 찾아와서 간단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20%”라고 했다. “남성 화장품을 검색해서 카돈을 발견하고 괜찮으면 사 보겠다는 생각으로 온 사람들 중에서 20%이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비중의 미국 남성들이 로션조차 바르지 않고 산다는 뜻이죠.”
정 대표는 2019년 미국 남성용 화장품 업계에 도전장을 내민 스타트업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성장해 현재는 뉴욕 맨해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와 아마존에서 짙푸른 청록색 디자인의 로션(모이스처라이저) 겸 자외선차단제, 세안제(클렌저), 다크서클용 아이크림 등을 판다. 화장품 시장은 넓지만 경쟁이 심하다. 대기업의 마케팅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인식이 강하다. 정 대표가 이 시장을 겨냥한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 남성 화장품 트렌드, 세계로 간다”
한국에서는 노년층 남성들도 흔히 로션을 구비해 둔다. 1960~1970년대부터 남성용 화장품이 출시되었고, 1990년대에는 주요 화장품 브랜드마다 ‘보닌(LG생활과학)’ ‘오디세이(아모레퍼시픽) ‘꽃을 든 남자(소망화장품)’ 등 남성용 스킨 로션 광고를 내보낸 결과다. 젊은 남성들은 보다 적극적이다. BTS처럼 적극적인 화장은 아니더라도, ‘피부관리’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한국을 벗어나면 딴판이다. CNN이 인용한 유로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남성용 화장품 시장은 2010년대 중반까지 세계 1위였다가 최근에는 중국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두 나라를 벗어나면, 비누 외에 다른 물건을 얼굴에 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미국 생활용품 회사 P&G에서 8년 넘게 일한 정 대표가 주목한 것은 이 지점이었다. 지난 30여년 사이 한국 남성들은 화장품을 더 많이 쓰게 되었고, 더 좋은 것을 쓰게 되었고, 세세하게 나뉜 용도에 맞는 화장품을 갖추어 왔다. 이 트렌드가 분명히 전 세계에서도 곧 나타날 것이라고 그는 봤다.
“한국과 싱가포르 P&G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와튼에서 MBA를 받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곳 화장품 시장이 한국에서 보던 것과 너무 달랐어요. 한국 시장에선 남성용 화장품 브랜드가 이미 너무나 많았는데 미국에선 개당 50~60달러(약 6만~7만원대) 제품이 아니면 10달러 안팎의 중저가 제품, 두 가지로 시장이 딱 나뉘어 있었죠.”
제품 가격이 20~40달러대인 ‘중간 시장’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수요가 없을 리는 없었다. 뉴트로지나 제품을 쓰는 이들이 ‘조금 더 좋은 것’을 쓰고 싶을 때 찾을 만한 제품을 만들면 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 남성들은 이미 스킨 로션을 넘어 페이스워시(클렌저), 아이크림까지 흔히 쓰는데 미국 남성들은 이제 막 화장품류에 관심을 가지는 단계였습니다.”
한국 남성이 화장품 사용을 더 익숙하게 여기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추운 겨울 날씨 탓에 건조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혹은 아시아계 피부가 좀 더 부드럽고 예민하지 않을까? 정 대표는 “인종마다 피부 차이는 있지만 화장품 사용 여부는 인식의 문제”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주름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는 햇빛과 추위, 더위 등 날씨로 인해 생기는 주름을 긍정적인 노년의 상징, 현명해 보이는 모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한국 소비자들이 피부 자극을 더 느끼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면도 자극은 미국 소비자들이 훨씬 많이 느낍니다. 백인들은 수염이 아시아인보다 좀 더 뻣뻣하고, 흑인들은 꼬불꼬불한 수염 탓에 고생을 많이 하거든요.” 그는 소비자 조사 과정에서 “(면도하는 게 아프다고 느껴서) 면도를 하지 않는다거나 면도를 하기 싫어한다는 응답이 상당히 많았다”고 전했다.
◆ P&G에서 화장품 마케팅 경험 바탕으로 ‘도전’
정 대표는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수학과 과학이 영어나 국어보다 좋았고, 로봇을 만들고 싶어서전기공학을 배우기로 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며 경영을 하는 데 더 관심이 갔어요. 여름에 P&G에서 마케팅 인턴십을 했는데 여성용 화장품 SK II의 소비자 조사를 경험하면서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이 길로 빠졌어요.”
데이터를 수집해 코딩하고 반응을 분석하는 일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였다. P&G의 브랜드 매니저로 입사해 SK II, 질레트, 올레이 등을 담당했다. “광고를 제대로 하면 곧바로 소비자 구매가 늘어나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어요. 특히 브랜드 매니저는 일종의 ‘소사장’ 역할을 하게 되니까 더욱 애착이 갔지요.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를 담당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더 경험하고 싶어 MBA를 결심했습니다.”
그에게는 MBA 과정이 곧 창업의 과정이었다. 모든 수업이 그에게는 당장 써먹어야 하는 실전 팁이나 다름 없었다. 남성용 화장품을 생각한 다음엔 곧바로 주변인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와튼스쿨 룸메이트였던 재클린이 공동 창업자로 합류했다. 남성 동기들에게 피자 파티를 열 테니 오라고 해서 심층 면접을 진행하며 아이디어를 다듬어나갔다.
“P&G에서 일하면서 백화점에서 로드숍까지 화장품 시장의 전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중반까지 백화점이 화장품 시장을 주도했고 이후 닥터 자르트 같은 ‘매스티지(대중이 쓰는 명품 스타일의 제품)’의 시장이 열렸어요. 그런데 미국 남성용 화장품은 아직 백화점의 비싼 화장품에 머물러 있고, 그 다음 시장을 주도하는 곳이 없습니다. 한국의 기술력을 가져와서 적절한 가격에 팔면 분명히 된다고 봤죠.”
처음 목표로 삼은 시장은 썬크림 겸 모이스처라이저(로션)이었다. “몇 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지만, 미국 남성들은 스킨케어가 여성스러운(girly)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나마 썬크림은 엄마나 여자친구가 쓰라고 강조하니까, 혹은 피부과에서 쓰라고 조언하니까 거부감이 덜합니다. 그래도 끈적거리고 하얗게 되는 백탁현상이 있어서 답답하고 싫다는 반응이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의 규제 대상이었던 탓이다. 2017년 와튼 MBA를 마친 후 그는 이 기간에 월마트 신선식품 부서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어떻게 보면 집중해야 할 때 외도를 한 셈이다. 정 대표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전자상거래(E-commerce) 업체의 성장을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실제로 2년 동안 월마트 전체에서 신선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1% 미만에서 8배 성장하는 모습을 봤다”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조직을 변화시켜 가는 모습을 본 게 스타트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 "구글 검색 결과가 남성들의 구매 기준..맞춤형 마케팅"
2019년 여름, 드디어 첫 제품이 완성됐다. 기름진 느낌, 발랐을 때 둔하고 답답한 느낌을 빼고 가볍게 발라서 보습과 자외선 차단을 동시에 노리는 제품이었다. P&G에서의 마케팅 경험이 빛을 발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남성들은 화장품을 사고 싶을 때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아요. 여성들은 ‘요새 뭐 쓰냐’고 흔히 묻지만, 미국 남성들은 구글에 '남성용 베스트 모이스처라이저' 이렇게 검색을 합니다. 구글 검색창에 남성용 화장품 관련 검색어를 넣었을 때 나오는 남성잡지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제품을 사용해보고 괜찮으면 기사에 다뤄달라고 요청했어요.”
이 방법은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뒀다. GQ는 ‘베스트 모이스처라이저’로 카돈 제품을 꼽는 기사를 실었다. 한국, 한국 화장품 등에 관심이 커지면서 포브스에서 카돈을 다루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어떤 잡지에서는 에디터들이 추가로 제품을 보내줄 수 있는지 물어볼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후 다양한 매체에서 카돈이 검색되고, 소셜미디어 광고 등을 병행하면서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했다.
클렌저와 아이크림 등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소비자가 강한 향과 자극으로 기억하는 애프터셰이브와 차별화하기 위해 향기나 자극이 거의 없도록 제품을 개발했다. 작년 매출은 2020년 대비 4배 이상 늘었다고 그는 밝혔다. “코로나19 이후엔 줌 미팅이 늘어나면서 아이크림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거울을 보듯 자기 얼굴을 계속 보게 되니까 다크서클 같은 게 눈에 띄고, 다른 사람들이 피곤해 보인다는 말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 대표는 “미국에서 남성용 화장품을 파는 것은 소비자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정말 다양한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운동을 하는데 운동 전과 후에 두 번 클렌저를 써도 되느냐’고 묻는 이메일을 받은 적 있어요. 진지하게 ‘집에서 나올 때는 물로 세수하고 운동 후 땀이 났을 때 클렌저를 쓰는 게 좋겠다’고 답장을 쓰며 이건 너무 상세한 게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났죠. 그만큼 비누 외엔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가 많다는 뜻입니다. 크림 같은 건 용량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서 동전 크기와 비교해서 알려주기도 해요.”
제품을 얼마나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떨 때 써야 하는지 등을 하나씩 설명하며 소비자와 관계를 쌓아가는 일은 그에게 큰 자산이기도 하다. 저절로 소비자의 애로사항을 알게 되고 다음 제품 개발과 마케팅 계획의 밑천이 되기 때문이다. “세 명 중 한 명은 제품을 재구매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입니다.”
투자업계 역시 카돈의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다. 스트롱벤처스, 본엔젤스파트너스, 미래에셋벤처파트너스 등에서 시드(seed) 단계 투자를 받았다. 만난 지 1주일 만에 계약서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올해는 시리즈 A 투자를 계획 중이다.
◆ “화장실에서 쓰는 모든 제품 만들 것”
카돈의 제품들은 한국에서 생산한다. “한국만큼 화장품 생산 기술이 발달한 곳도 없고, 미국에 비해 생산 단가도 훨씬 합리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한국 생산업체들도 미국 남성용 화장품 시장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카돈과 협업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2019년 첫 제품이 나온 후 4년차인 올해는 카돈에게 중요한 해다. 오프라인 진출 등 새로운 성장전략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미국은 전자상거래 비중이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오프라인 시장 비중이 큽니다. 카돈은 현재 공식 홈페이지와 아마존을 중심으로 팔리고 있는데, 올해는 백화점 남성 매장과 바버샵(이발소) 등 오프라인에서 소비자가 카돈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합니다.”
바디케어, 헤어케어 제품들도 순차적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제품 카테고리를 확장하면 소비주기가 더 짧아질 수 있고, 이는 그가 다음 단계로 구상하는 구독 모델 도입에 필수적이다. “좋은 구독 모델이 만들어지면 소비자도 차로 10~15분씩 드러그스토어에 오가지 않아도 되고 회사는 안정적인 매출을 바탕으로 성장을 계획할 수 있다”고 정 대표는 말했다.
“화장실에서 쓰는 모든 제품을 카돈 제품으로 통일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소비자에게 주겠습니다.”
실리콘밸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