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인생은 한국 기업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1966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2008년 삼성전자 고문으로 물러날 때까지 ‘삼성맨’으로 42년을 일했다. 그중 최고경영자(CEO)로 근무한 기간만 18년이다. 이름 없는 아시아의 한 기업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외 정치인과 정책 입안자들이 산업정책을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인물이 윤 전 부회장인 것도 이런 그의 이력 때문이다. 지난 17일 서울 테헤란로에 있는 사무실에서 윤 전 부회장을 만났다. 그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한 냉정한 평가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선거 과정에서 후보 간에 나라를 위한 미래 지향적인 얘기가 부족했다는 것을 가장 실망스러웠던 부분으로 꼽았다. 다만 윤석열 당선인이 경제정책을 제대로 세우고 이를 실천할 의지만 있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봤다. 윤 전 부회장은 이를 위해 기업에 대한 규제를 과감하게 완화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낼 동력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본과의 외교 관계 회복의 중요성도 언급했다. 무엇보다 경제·산업정책을 전문가에게 맡길 것을 당부했다. 이념이 아니라 전문성을 보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현 정부가 과거 5년 동안 저지른 실책을 잘 수습할 수 있는 방안을 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급증한 국가부채·가계부채 처리와 노동개혁, 연금 및 의료보험개혁, 탈원전정책 수정, 신재생에너지 및 탄소중립정책의 재검토 등이 해결해야 될 중요한 과제입니다. 선거 공약 중 불합리한 것이나 상대 후보를 의식해 떠밀려 한 공약은 국민에게 솔직하게 양해를 구하고 반드시 수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른바 포퓰리즘 공약들이죠.”
▷새 정부의 내각 구성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성공하려면 경제를 잘 아는 전문가를 기용해야 합니다. 내 말을 안 들을 게 걱정이 돼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쓰면 안 되지요. 능력이 떨어지니까 내 말을 잘 듣는 겁니다. 나보다 똑똑하면 반발을 많이 하겠지요. 그런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입니다. 예스맨을 써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를 장관에 앉히고 전권을 줘야지요.”
▷당선인 공약 중 어떤 것을 수정해야 할까요.
“노동이사제가 가장 급합니다. 노동권을 존중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무리 자동화가 진행되고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해도 노동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지요. 하지만 노동이사제는 아직 도입하기 이르다고 봅니다.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영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임금을 더 많이 받기 위한 수단으로 말이죠. 어느 선에선 통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진국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노동이사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유럽 몇몇 국가는 노동이사제를 적용하고 있지만 미국에선 활성화돼 있지 않죠.”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지만 노사 문제는 후진국 소리를 듣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념적으로 남북이 나뉘어 있습니다. 노동 이슈에 이념이 녹아들면서 문제가 복잡해졌어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세력으로 바뀌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노조도 이제 이념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후대가 미래에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선진국 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기업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기업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먼저 손봐야 할 규제는 무엇입니까.
“폐지 또는 완화해야 할 규제는 차고 넘칩니다. 제가 세어 보니 윤 당선인이 선거기간 동안 폐지하겠다고 공약한 규제는 80여 개였습니다. 그 가운데 시급한 것은 중대재해처벌법, 주 52시간 근무제도, 최저임금제도 등입니다. 다만 이들 규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려면 관련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줄곧 입법 독주를 해 오던 거대 야당(더불어민주당)이 얼마나 협력해 줄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많이 우려됩니다.”
▷역대 정권이 출범 초기 규제완화를 외쳤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습니다.
“조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미래를 설계하고 이를 위한 방안을 기획하는 것입니다. 가장 골치 아프지만 정답은 없지요. 반면 남을 평가·관리하고 감사하는 일은 달라요. 이런 일을 하면 조직 내에서 힘도 생기고 생색도 나지요. 명절에 사과 궤짝 하나라도 받을 수 있습니다. 공무원 사회도 똑같다고 봐요. 친기업정책을 설계하고 밀어붙이는 공무원의 사기가 올라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이들이 규제완화정책을 입안하고 친기업정책 기조를 일관성 있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죠. 그러기 위해선 감사원과 검찰이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공무원이 일할 때 나중에 감사나 수사를 받을까봐 무서워서 규제개혁을 못하는 일이 생겨선 안 됩니다.”
▷규제완화엔 강력한 반대와 저항이 따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규제개혁은 어떤 저항이 있어도 반드시 추진하겠다는 지도자의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혁신은 어떤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강력히 추진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혁신과 변화는 난관을 뚫고 이기기 위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1970년대 과다한 사회복지 지출과 노사분규로 멍들어 가던 영국을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총리가 강인한 지도력으로 회생시켰습니다. 장기간 계속된 석탄노조 파업을 진압하는 등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고 ‘영국병(British Disease)’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의 강력한 신념과 추진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만연한 반(反)기업 정서를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업의 가치를 국민이 알 수 있도록 해야죠. 경제가 튼튼하지 않으면 국방, 외교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농경 사회부터 산업화 이후 시대까지 세금 때문에 민란이 일어난 경우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경제 주체를 크게 기업 가계 정부로 나눌 수 있는데 기업이 있으니 그 세금으로 정부가 유지되고, 기업에서 일해 번 소득으로 가계가 버틸 수 있는 겁니다. 기업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 기업을 적대시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검찰 수사를 하고 그래선 안 되지요. 정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친기업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물론 기업도 사회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하고 사회의 모범집단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기업이 존경받고 국민의 지지와 협조를 받아 성장 발전할 수 있습니다.”
▷기업인은 정부가 돕지 않아도 되니 간섭만 말아 달라고 합니다.
“내버려 두면 잘하는데 왜 자꾸 간섭하려고 합니까. 일자리 감소 등으로 정부가 비난받으면 기업 탓으로 돌리려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예산으로 일자리를 만들면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예산이 떨어지면 일자리도 없어지지요. 기업은 소득과 직업 안정성 측면에서 훨씬 더 훌륭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마음 놓고 투자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줘야 해요.”
▷일본과의 외교 관계 악화로 기업 부담도 커졌는데요.
“일본 문제는 국내 정치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인 문제를 끌어들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외교에선 과거 이야기를 자꾸 꺼내선 안 됩니다. 과거라는 것은 좋은 얘기만 있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분업화를 통해 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자원이 없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소재 부품을 가져오지 못하면 그만큼 코스트(비용)가 올라가고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 정부는 하루빨리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켜 경제 파트너로 삼아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드러커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기업가정신이 가장 충만한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을 일으킨 한국인의 도전정신과 역동성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정권에선 그런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탈원전정책이 대표적입니다. 원전만큼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원을 찾아보기 힘든데 비전문가들로 인해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만들어졌습니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아시아에서 인천공항보다 앞서는 초대형 공항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천공항은 비정규직 문제에 발목 잡혀 경쟁력 확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요. 새 정부는 이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 바랍니다.”
▷정권 초기 반드시 개선해야 할 점을 꼽는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진입해 자손 대대로 일류국가로 남느냐, 아니면 후진국으로 다시 추락하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와 불공정은 정권 초기에 반드시 개혁해야 합니다. 이는 과거 적폐에 대한 복수가 아닙니다. 부정부패와 불공정이 없고 상식이 통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사회가 쉽게 혁신하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 윤종용 前 삼성전자 부회장
△1944년 경북 영천 출생
△196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1966년 삼성그룹 입사
△1977년 삼성전자 도쿄지점장
△1980년 삼성전자 TV사업부장
△1985년 삼성종합연구소장
△1992년 삼성전자 가전부문 사장
△1992년 삼성전기 사장
△1994년 삼성전관 사장
△1995년 삼성그룹 일본본사 사장
△1997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2000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2008년 삼성전자 상임고문
△2011년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
정리=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