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했던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사진)이 기습 연임을 시도하고 있다. 원전업계는 월성원전 경제성 평가 조작으로 기소까지 된 정 사장이 ‘탈원전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건 윤석열 정부에서 한수원 자리를 지키는 것은 전형적인 ‘알박기’라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도 정 사장의 거취를 두고 골머리를 앓고 있다.
16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정 사장은 지난달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 본인의 1년 연임안을 통과시켰다. 4년간 한수원 수장 자리를 지킨 정 사장이 오는 4월 4일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임기 연장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월성 1호기 가동 중단 등 탈원전 정책에 반대했던 이관섭 전 사장이 임기를 1년10개월 남긴 2018년 1월 물러나자 그해 4월 취임했다. 이번 임시 주총을 소집하면서 연임안 통과 사실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내부 입단속에 만전을 기했다는 전언이다. 또 주총 안건에 상정된 점을 감안할 때 현 정부도 정 사장의 연임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정 사장이 탈원전 추진 과정에서 대표적 무리수로 꼽히는 월성 1호기 경제성 조작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강행하는 과정에서 배임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과 오는 22일 5차 공판기일을 앞두고 있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 외국에선 공공기관 최고경영자(CEO)는 기소 자체로 결격 사유가 된다”고 말했다.
더불어 ‘탈원전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신한울 3·4호기의 건설 재개를 조속히 추진하겠다고 밝힌 윤석열 당선인과 보조를 맞추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정 사장은 이종호 전 한수원 기술본부장을 보직 해임하는 등 사내 원전 유지파에 대한 인사 숙청을 강행하기도 했다. 원전 조직도 대폭 축소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이란 회사명에서 ‘원자력’을 빼자는 주장도 했다. 이렇게 탈원전 정책에 앞장섰던 그는 작년 말 돌연 입장을 바꿔 “신한울 3·4호기는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등 탈원전과 거리를 두는 듯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탈원전에 앞장섰던 인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자기모순이며 새 정부의 추진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윤 당선인과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선임되는 게 상식적”이라고 말했다.
산업부 산하 공기업·공공기관 사장은 주총을 거친 뒤 산업부 장관의 제청을 거쳐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재가하는 절차를 밟는다. 산업부는 아직 청와대에 제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안팎에선 문승욱 장관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등과 상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