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위기가 높아질 때 일본 엔화 가치는 상승하는 외환시장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빚어진 시장 불안 속에서도 엔화 가치는 5년여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의 환율 방어선인 ‘구로다 라인(달러당 125엔)’이 무너질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16일 외환시장에서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한때 달러당 118.43엔까지 뛰었다. 엔화 가치는 5년2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달 24일 이후 엔화 가치는 3.2% 하락했다. 주요국 통화 가운데 터키 리라화 다음으로 낙폭이 컸다.
그동안 국제 금융시장에서 엔화는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다. 전쟁 등으로 투자자의 위험 회피 심리가 강해지면 어김없이 가치가 올랐다. 대외자산 30년째 세계 1위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엔화 환율은 4개월 만에 달러당 110엔대에서 80엔대로 떨어졌다(엔화 가치 상승).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는 환율이 75.32엔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안전자산 엔화’ 신화의 주역은 수출 제조업체들이었다. 도요타자동차와 소니 등 일본의 대표 제조업체들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외화를 팔고 엔화를 샀다. 경상수지 흑자가 쌓이면서 2020년 말 일본의 대외 순자산은 356조9700억엔(약 3746조5786억원)으로 30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우에노 다이사쿠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수석전략가는 “지정학적 위기로 금융시장이 불안해도 엔화 가치는 일본의 경상흑자 덕분에 계속 오를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엔 캐리 트레이드도 ‘위기 때는 엔화 매수’ 공식을 굳어지게 한 재료였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이자율이 거의 ‘제로(0)’인 일본에서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해외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전략을 말한다. 투자자들은 위기가 발생하면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하고 엔화를 매수함으로써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는 주체로 변신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기존의 공식이 통하지 않는 것은 경상흑자와 엔 캐리 트레이드라는 양대 축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 제조업체들은 ‘엔고(高)’를 피해 해외로 나갔다. 일본의 수출 규모 역시 크게 줄었다. 반대로 동일본대지진 이후 원자력발전 비중을 낮추기 위해 화력발전 의존도를 크게 높인 결과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이 급증했다. 일본 경제가 에너지 가격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에너지 동향에 취약한 체질로올 들어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일본의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하면서 엔화 가치 하락세는 더욱 가팔라졌다. 지난 1월 일본의 경상수지 적자는 1조1887억엔으로 역대 두 번째로 많았다.
위기 때마다 엔화를 사들이던 엔 캐리 청산 수요도 예전 같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낮추면서 엔화 대신 달러를 빌려 다른 나라 자산에 투자하는 ‘달러 캐리 트레이드’가 유행했다. 전문가들은 경상수지 적자가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엔화 가치 하락이 다시 경상수지 적자 폭을 키우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달러당 125엔인 구로다 라인이 무너질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구로다 라인은 달러당 엔화 가치가 125엔 가까이 급락했던 2015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엔저가 더 진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언해 추가 하락을 막은 데서 나왔다. 이후 외환시장은 달러당 125엔을 일본은행의 환율 방어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지 마코토 SMBC닛코증권 수석전략가는 “일본의 경상수지 적자가 일상화하면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25~130엔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