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은 서해와 백두대간을 잇는 한강 수로망을 이용해 쌀 같은 특산물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조운체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소작료, 땔감과 공공건축에 사용될 재목, 소금, 생선 등을 보급받았다. 한반도는 지형이 험한 데다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려고 넓은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으므로 한강 수로망에 크게 의지했다. 한양의 한강가에는 20여 개 나루터가 있었고, 몇 곳에는 창(창고)이 존재했다. 바다에서 올라온 곡식 등의 물품은 광흥창(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산은 군자강창에 보관했다. 그러나 규모나 시설, 역할 등으로 보아 상업항 기능은 못했고, 개경과 비교하면 해양무역과 연결되는 항구의 역할은 미약한 수준이었다. 한양의 한계와 신수도 건설 시기에 대한 의문한양은 지식관료들의 수도, 방어적인 약소국의 수도로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국가 산업과 상업, 무역을 발전시키는 경제도시, 개방적인 국제도시의 역할을 하려면 시설을 보완하고 도시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했다. 사대문, 사소문과 연결된 육로를 확장하고 신도로를 개설해서 사통팔달하게 만들어야 했다. 한강에는 자연 나루터가 아닌 부두를 신축하고, 창고 시장 등의 시설을 보완해 항구들을 개발해야 했다. 청계천을 계속 준설해 수로망으로 활용하고, 고구려의 평양성처럼 용산강에서 남대문까지도 수레길이나 운하를 건설해야 했다. 외곽 도시들, 특히 인천(능허대), 김포, 강화 등에 항구도시들을 개발해 한양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다. 또 강변방어체제를 촘촘하게 쌓고 강상수군도 양성해야 했다.
그런데 한양의 기본 구조와 역할은 천도 초기의 불가피한 급박한 상황이 지난 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세종대왕은 도성을 개축했고, 수군력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귀화한 왜인과 유구(오키나와)인을 동원해 전선을 개량해 양화도(양화대교 아래)에서 시험 운항도 했다. 하지만 한양의 기본적인 한계를 해결하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 그 후에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런데 신수도를 건설한 과정과 시기가 과연 적합했느냐는 의문이 든다. 1394년 8월에 한양이 수도로 결정된 후 1395년에는 종묘와 경복궁을 완공했고, 사대문과 궁궐 성곽도 이른 시간 안에 건설됐다. 북한산성은 둘레 약 18㎞에 높이 15척(4.5m)의 석성과 토성인데, 1396년에 축성됐다. 남대문은 1396년, 동대문 옹성은 1399년에 완성됐다. 훗날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국가 재정을 파탄 내고, 백성의 원성으로 자신이 몰락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신수도 건설은 엄청난 경제력을 투자하고, 수많은 노동력을 동원한 대역사였음이 분명하다. 수도는 실용성·국제 질서·국가 미래 고려해야조선 건국 당시는 정변한 직후라 민심이 불안했고, 생활도 불안정했다. 왜구는 수도를 한창 건설 중인 1393~1397년 사이에만 무려 53회 침공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천도를 강행했다면 고려가 남긴 경제력과 방어력이 충분했거나, 아니면 엄청난 국고의 손실과 안보 위협을 무릅쓴 채 강행한 꼴이 된다.
한양은 500년 동안 조선이 방어적 습성을 갖고, 내부 지향적인 정치와 폐쇄적인 경제를 유지하는 체제로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일제의 경성부로서 35년 동안 지배와 수탈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서울은 약소국인 한국을 60여 년 만에 경제력이 세계 10위를 넘나드는 성공한 나라로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자연과 풍수는 변화가 없었고, 오로지 변화된 국민 및 시민의 의식과 무한한 노력, 실용적인 정책 덕분이다.
수도의 선택은 정권의 운명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므로 실용성, 국제 질서, 국가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이 공동 책임을 지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의 합의와 책임 의지의 점검이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