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식백지신탁 하한금액 3000만→5000만 늘어나나

입력 2022-03-11 07:28
수정 2022-03-11 12:31
인사혁신처가 발주한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정부가 주식백지신탁제도의 하한금액을 5000만원으로 늘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주식백지신탁제도란 고위공직자가 직무와 관련한 주식을 보유한 경우 이를 2개월 안으로 팔거나 백지신탁하도록 해 이해충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 제도다. 현행 제도에선 그 하한선을 3000만원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한도를 2000만원 올리는 내용이 검토되고 있는 것이다.

11일 한경닷컴이 단독 입수한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가 작년 하반기 현행 주식백지신탁제도의 운영상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인사행정학회에 발주한 연구용역에서 이같은 결론이 나왔다. 작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이 연구 보고서는 직후 인사혁신처에 제출됐다.

공직자윤리법 제14조와 시행령에서는 고위공직자와 이해관계자(배우자·직계존비속)가 보유한 주식의 총 가액이 3000만원을 넘으면 주식을 팔거나 금융기관에 신탁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신탁 받은 금융기관은 매각 등 방식으로 주식을 운용하게 되는데, 이런 거래 정보를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기 때문에 '백지신탁'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이다.

보고서는 주식백지신탁제도의 의무이행 하한금액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해마다 주식시장이 급변하고 있는 만큼 법령 하한금액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는 게 요지다. 각종 자산가격이 급등한 가운데 3000만원이라는 가격 기준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도가 만들어진 시점 이후 코스피지수 변동과 물가상승률, 국민소득의 변동 수준을 근거로 재산정할 필요가 있다고 연구진은 지적했다.

보고서는 "연구원과 교수, 변호사, 금융업계 종사자 등 전현직 주식백지신탁제도 심사위원들을 대상으로 전문가 인터뷰를 추진했다"며 "상장주식을 대상으로 현 하한금액의 2배 수준인 5000만원으로 올리는 게 적정하다고 응답한 의견이 가장 많았다"고 전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공기업 최고경영자(CEO)가 자사 주식을 갖고 있는 경우 제도 적용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점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현행 제도에선 공기업의 장과 임원들도 주식백지신탁제도 적용 대상자다.

연구진은 "자사주 보유는 사익과 공익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효율적 수단이므로 직무관련성 심사에서 빼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과, 임기 내 주가 부양을 위한 무리한 시도가 있을 경우 이해충돌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팽팽했다"며 "공기업 CEO를 예외로 하는 방안을 국민 정서상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어 장기적, 점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인사혁신처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다만 정부가 으레 연구용역을 통해 정책을 마련, 개선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보고서 결론대로 하한금액을 올릴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상황이다. 특히 인사행정학회가 인사혁신처를 주무관청으로 두고 있는 만큼 이번 위탁 용역의 결론이 인사혁신처의 기조와 같은 방향일 가능성이 높다.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연구내용을 참고해 주식백지신탁 제도개선과 발전방안에 활용할 수 있다"면서도 "보고서의 제언 중 어느 부분을 수용할지, 제언내용을 그대로 수용할지 등에 대해선 아직 정해진 바 없다"고 밝혔다.

한편 보고서의 결론을 접한 시장 전문가들은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미국 의회가 의원들의 주식 투자를 아예 금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 등 규제 강화에 나선 상황을 감안할 때 '하한금액 상향' 결론은 글로벌 규제 동향에 역행하는 조치라는 판단이다. 올 2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국회의원 본인과 배우자, 부양 자녀의 개별주식 소유와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 마련에 나설 것을 하원 운영위원회에 지시했다.

최근 법제처에 요청한 법령해석도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리는 행보로 지적된다. 인사혁신처는 최근 법제처에 '공개대상자(고위공직자)나 그 이해관계자가 주식을 증여하는 것도 주식을 매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와 관련한 법령해석을 요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대해 법제처는 증여도 매각 행위로 볼 수 있다고 답을 내놨다. 법제처의 논리는 고위공직자나 이해관계자는 제3자에게만 증여할 수 있으므로 백지신탁제도의 취지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시장의 생각은 다르다. 증여를 자산 은닉의 수단으로 악용해 백지신탁 의무를 비껴갈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에서 주식거래 금지 움직임이 일고 있을 뿐더러 국내에서도 'LH 사태' 이후 이해충돌 방지가 주요 화두가 된 상황인데, 정부는 하한금액을 높이는 등 오히려 규제 완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공직자 윤리가 후퇴할 것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