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수사' 밀어붙인 강골검사…대권 도전 9개월 만에 靑 입성 [걸어온 길]

입력 2022-03-10 05:00
수정 2022-03-10 11:50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2020년 10월 22일 국회의 대검찰청 국정감사. 당시 윤 총장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세 차례 발동한 데 대해 “위법하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쏟아내는 비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날 국감은 ‘강골 검사 윤석열’을 20대 대통령으로 바꾼 전환점이 됐다.

윤석열 당선인의 일생을 꿰뚫는 신념은 ‘법치와 원칙’이다. 이런 신념에 위배되면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검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선택의 순간마다 그는 ‘법과 원칙’을 선택했다. 선택은 때로는 시련을 불러왔지만, 결국 그를 더 크게 만들었다.서른다섯, 대구서 검사생활 첫 발윤 당선인은 1960년 12월 18일 서울 연희동에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와 최정자 이화여대 교수 부부의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원칙주의자’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충청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충청도는 그의 부친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엔 방학 때마다 강원 강릉의 외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의 외할머니는 강릉중앙시장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다. 윤 후보는 사석에서 “너무 외탁하면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씀에도 외할머니와 특히 가깝게 지냈다”며 “정서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분이 외할머니가 아닌가 싶다”고 종종 말하곤 했다.

1979년 충암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79학번)에 입학했다. 5·18 광주민주화 항쟁 열흘 전인 1980년 5월 8일 학내 모의재판에서 재판장을 맡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이후 혹시 있을지 모를 처벌을 피해 강릉 외가로 석 달간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사법시험은 1991년 합격했다. 사시 합격을 위해 9수를 한 건 이미 유명한 일화다. 술과 사람을 좋아해 2차에서 여러 번 낙방을 거듭했다고 한다. 술자리에서의 토론도 즐겨 후배들 사이에선 “신림동(서울대 고시촌이 있는 지역, 현 관악구 대학동)의 신선”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와 함께 공부한 후배들은 “석열이 형은 하나의 주제를 매우 깊게 파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사법연수원 동기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1994년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첫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불법 대선 자금 수사, 2006년 현대자동차 비자금 수사 등 굵직한 정·관계 비리 수사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일반 대중에게 처음 이름이 알려진 건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조작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을 때였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을 위해 포털사이트 등에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윤 당선인은 서슬 퍼런 집권 초기 국정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박근혜 정부에 ‘불편한 수사’를 밀어붙였다.

이후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이 혼외자 스캔들로 낙마하면서 윤 당선인 역시 수사팀에서 배제됐지만,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시 국감에서 윤 당선인은 “수사 과정에 외압이 심했다”고 폭로했다. 이 발언은 즉각 정치권 최대 이슈로 번졌다. 잘 알려진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도 이 자리에서 나왔다. 윤 당선인은 이 사건으로 정직 1개월의 처분을 받고 대구고등검찰청 검사로 좌천됐다. 시련은 3년여간 계속됐다.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로 인생 반전박근혜 정부 말기에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그의 인생에도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지방 검찰청을 돌던 윤 당선인은 2016년 말 박영수 특별검사가 이끄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팀에 수사팀장으로 합류했다. 수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최순실 구속,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등으로 이어지며 사회적으로 주목받았다.

2017년 5월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청산’ 수사에 기여한 윤 당선인을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했다. 사법연수원 기수를 다섯 단계 건너뛴 파격 인사였다. 청와대가 검찰 인사 기자회견에서 “서울중앙지검장에 윤석열”이라고 발표하자 출입기자들의 놀라움 섞인 탄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윤 당선인은 그로부터 2년 뒤인 2019년 6월 검찰총장에 올랐다. 당시 문 대통령, 윤 당선인, 조국 민정수석 세 사람이 검찰총장 임명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 누구도 윤 당선인이 문재인 정권에 맞서는 ‘정권교체론의 기수’가 될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국 사태’는 윤 당선인의 운명을 다시 한번 바꿔놨다. 문 대통령은 검찰개혁을 명분으로 조국 당시 민정수석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윤석열 검찰총장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늦추지 않았고, 그 결과 윤 당선인은 정부·여권과 대척점에 섰다. 조국 장관 후임으로 법무부 장관을 맡은 추미애 전 민주당 대표와도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검찰총장에서 스스로 물러난 윤 당선인은 3개월여 뒤인 지난해 6월 29일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7월 30일엔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이후 대권을 향한 숨가뿐 질주가 이어졌다. 윤 당선인은 당내 경선에서 홍준표 의원과 접전 끝에 국민의힘 대선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당내 권력 구도와 선거대책위원회 운영을 두고 이준석 대표,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지지율이 추락하기도 했지만 이 대표를 껴안으면서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윤 당선인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인들은 “권력에 굴하지 않았던 뚝심과 강단이 대통령으로서 가장 큰 강점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족한 정치 경험과 정책·행정 능력은 극복해야 할 과제다.

윤 당선인의 핵심 측근은 “결국 적재적소에 사람을 기용하는 인사가 윤석열 정부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상훈 기자 up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