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미술관 리움 ‘아트스펙트럼 2022’의 관객과 작가 김정모(이하 ‘작가’)는 아래와 같이 미술작품 지분의 양도에 대한 계약을 체결한다.(후략)”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방 앞에 걸린 금속판에 계약서 형식의 기나긴 설명이 적혀 있다. 그 앞에 관객이 줄을 늘어서 있고, 다른 쪽엔 대기표 뽑는 기계도 놓여 있다. 김정모(42)의 개념미술 작품 ‘시간-예술거래소’다. 작품은 매일 선착순 100명만 관람할 수 있는데, 방 안에 들어선 관람객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데 쓴 시간으로 작품 지분을 구입하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해 보관함에 넣게 된다. 리움은 “작품 제작에 참여하고 지분을 구입하면서 미술품 구입과 소장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한남동 리움 그라운드갤러리에서 아트스펙트럼 2022 전시가 열리고 있다. 아트스펙트럼은 2001년부터 실력 있는 젊은 작가의 등용문 역할을 해온 삼성문화재단의 지원 사업이다. 지금까지 조명한 작가는 모두 58명.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만 해도 이형구(2007년) 문경원(2015년) 이완(2017년) 등 3명을 배출한 명문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리움의 큐레이터 4인과 외부 큐레이터·평론가 4인이 추천해 8명의 작가를 선정했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전현선(33)의 거대한 수채화 ‘두개의 기둥과 모서리들’을 만난다. 여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작품 크기가 가로 4m, 세로 6m에 달해 거대한 벽처럼 보인다. 리움은 “그 자체로 벽과 기둥 등 건축 요소가 되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김동희(36)가 전시장 곳곳에 배치한 핸드레일과 벤치, 기둥 등도 마찬가지로 건축 요소의 성격을 띤 작품이다. 관객이 전시 공간을 낯설게 보도록 하기 위해 설치했다.
소목장 세미(35)의 ‘체력단련활동장’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전시장 한가운데에 소목장(小木匠) 기술로 원형 트랙과 평균대, 공중그네와 클라이밍 벽 등을 만들어 체육관이자 서커스장을 완성했다. 작품과 함께 설치된 TV에서는 여성 서커스 아티스트가 작품을 이용해 곡예를 펼치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젊은 여성인 작가가 목수 일을 하며 겪은 어려움 등을 서커스 곡예에 비유했다는 설명이다. 작품 곳곳에는 짜맞춤 기법 등 다양한 전통 목공 기술이 사용됐다.
이 밖에 박성준(43)은 1980년대 한국의 일반적인 가정집 모습을 재현하고 태극기와 건전가요 등 당시의 권위주의 사회를 연상시키는 요소를 통해 사회적 억압을 표현한 ‘가화만사성’을 선보였다. 노혜리(35)의 설치작품 ‘폴즈’, 안유리(39)의 ‘스틱스 심포니’와 차재민(36)의 ‘네임리스 신드롬’ 등 영상 작품도 나왔다.
리움의 이름값에 비하면 문제의식의 깊이나 이를 전달하는 방식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신선함이 돋보이는 전시라는 게 미술계의 평가다. 미술계 관계자는 “함께 열리고 있는 중국계 미국 작가 이안쳉의 개인전과 함께 재개관 이후 확 젊어진 리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리움은 실험적인 미술 전시를 이어갈 계획이다. 오는 9∼11월에는 ‘증강현실’전(AR·가제)과 함께 미래 사회의 문제와 대응책 등을 다루는 아시아 예술가의 그룹전 ‘구름산책자’가 예정돼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