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팬데믹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우울증이나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OECD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인의 우울증 유병률은 OECD 회원국들 중 1위인 36.8%로, 10명 중 4명가량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감기’라고도 불릴 정도로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현대인의 질병 중 하나인 우울증은 인지, 사고, 기억, 판단, 대인관계 등에서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라도 우울증은 더 심각한 상태로 발전하기 전에 조기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울감이 느껴질 때, 심리적 안녕을 위해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정신과 의사를 통한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약물치료, 병원이나 연계된 기관에서 심리치료사에게 심리검사와 치료를 받는 방법, 그리고 심리상담사와의 대화를 통해 심리적인 어려움이나 불편감을 털어놓고, 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심리치료나 상담서비스에 대한 진입 장벽은 다소 높은 것이 현실이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간적 여유 부족, 지리적 접근성의 한계, 금전적인 부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과 치료 및 상담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한 사회적 시선의 두려움으로 심리적 문제를 적시에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비대면 심리상담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증가해오다가 COVID-19 확산과 맞물려 폭증한 실정이다. 사람보다 AI가 고민을 털어놓기 편하다?사실 비대면 심리상담 연구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대면 심리상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24시간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고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부담 없이 비용 대비 높은 효과를 기대하며 심리상담을 접할 수 있도록 기술적 보완에 대한 노력은 계속됐다.
기술개발 노력은 2013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로 인해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내용이 상당히 흥미롭다. 당시 아바타 수준 정도였던 엘리(Ellie)라는 가상인간은 외상후스트레스(PTSD) 관리를 목적으로 개발되었는데, 퇴역 군인이 사람보다 엘리에게 더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기계에 말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증상을 보다 편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경향이 높았다. 이러한 의외의 현상을 응용하여 세계 여러 스타트업이 AI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다. AI 심리상담사와의 라포 형성 과연 가능할까
심리상담의 성패는 라포형성(Rapport building)에 있다는 말이 있다. ‘라포’란 상호신뢰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상담사가 내담자와 의사소통을 하면서 서로 내적 친밀감과 신뢰를 갖추어 공감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라포형성에서 중요한 점은 상담사의 표정이나 눈 깜빡임, 호흡, 말의 속도와 같은 신체적 움직임을 포함한 비언어적 태도라고 한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진정한 인간관계나 상호작용을 이루려면 그 안에서 나 자신이 편하고, 상대방이 나의 잠재력을 뚜렷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AI 심리상담사가 내담자의 잠재력을 파악하여 내담자로 하여금 경청하고 있음을 전하고 진정한 라포를 형성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 심리상담이 보편화 된다면 우울감으로 인해 심리상담이 필요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문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2020년 말, 오라클이 국내 직장인 1천여 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약 87%가 심리치료사나 상담사를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는 사람의 판단이나 편견 없이 고민을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 때문이라고 응답하였다. AI와의 소통에 호의적인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관련 기술도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국내 다수의 기업들도 온라인 심리상담 플랫폼과 제휴하여 직원들에게 비대면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직원들의 높아진 스트레스를 관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비대면 심리상담 시장의 규모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심도 깊은 대화 가능한 AI 심리상담
대표적인 AI 심리상담사로 정신건강 플랫폼을 개발한 미국 스타트업 워봇헬스(Woebot Health)의 AI기반 심리상담 챗봇 ‘워봇’이 있다. 워봇에 탑재된 프로그램의 핵심은 관계형 에이전트인데, 이는 사용자와 장기적으로 사회적, 정서적 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이다. 워봇은 자연어 처리가 가능한 챗봇 형태로 내담자의 기분이나 상태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내담자의 말에 대응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전 세계 135개국에서 매월 수십만 명의 활성 사용자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작년 9천만 달러의 추가 투자 유치와 더불어, 미국 식품의약국(FDA)로부터 워봇의 디지털 치료가 산후 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음을 인정받았다.
기존에는 경험 많은 전문 심리상담사 내지는 심리치료 전문 의학자들이 쌓아 온 관련 지식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심리치료와 상담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AI 심리상담사는 내담자의 행동 양식을 비롯한 언어, 대화록 등 심리적 상태를 추론할 수 있는 핵심 단서들을 분석하여 이를 기반으로 내담자에게 접근한다. AI는 방대한 심리학적 지식과 상담 기록 및 대화와 같은 상담에 필요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기본적인 패턴에 대한 빠른 학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체계적으로 축적한 패턴을 기반으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거나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며 상담 시 적절한 상호작용이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데이터뿐만 아니라 AI 안면인식 기능, 음성 신호처리 기술을 활용하여 언어 외적인 주변 영역에 대한 정보 처리도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내담자의 태도와 신체적 변화까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를 심리 상담에 반영한다. 상담사의 통찰력이 필요한 심리 치료와 상담 분야에서 다양한 AI기술이 적용되는 모습이 놀랍다.
AI 상담서비스의 정교함이 고도화되어 사람 간 정서적 교류까지도 흡사하게 구현해 낸다면 차마 못다 한 내면의 소리를 AI에게라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AI 심리상담사가 나의 미세한 숨소리마저 분석하여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 파헤치는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AI 심리상담 수준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