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설비 패키지를 판매하는 기업의 사내변호사에게 익명의 이메일 제보가 들어왔다. 영업직원 A가 상습적으로 패키지 구성 제품 일부를 빼돌려 외부 업체를 통해 은밀히 재판매한다는 내용이었다. 제보자는 신원 공개를 꺼리나 (“사정상 신원을 밝히지 못하는 점 이해 바랍니다”), 내부 절차와 최근 기업 사정까지 세세하게 이해하는 점을 보면 현직 영업팀원으로 짐작된다. 제보상 중요 사실관계 (피해 고객사, 빼돌린 제품 종류)가 확인되지 않지만, 제보가 사실이라면 영업팀장과 다른 팀원도 비리에 적극 가담했거나 묵인했을 수 있다.
이 사례는 영업직원의 비위행위이지만 자금관리, 협력업체 관리 등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직원이 권한과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배임 행위가 일어날 수 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의료기기업체 사례처럼 기업 손해가 수백억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기업 내 배임 사건은 업무 분담과 감독 체계상 구조적 결함과 도덕적 해이를 배경으로 하고, 동일한 지휘 관리체계에 있는 직원들이 집단적으로 연루된 경우가 많다. 기업은 철저한 조사로 표면상 드러난 비위 배후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고 인사조치, 손해 전보, 형사고소, 조직 개편, 컴플라이언스 제도 개선과 같은 후속조치를 강력히 실행해야 한다.
A의 배임 행위 제보를 받은 기업이 본격 조사 (면담, 서류 검토, 포렌직 등)에 앞서 조사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 다뤄야 할 몇 가지 문제와 효과적 대응 방안을 짚어보자.
우선 제보자 문제다. 일반적으로 말해 제보자가 신원을 밝히면 기업은 첫 단계로 기밀유지에 신경 쓰면서 본인을 직접 만나 조사한다. 그런데 사례처럼 배임 제보자는 신원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고, 본인이 아는 사실과 보유 증거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기도 한다. 예컨대, 제보자도 같이 영업에 참여한 고객사 리스트, 제품 빼돌리기에 관한 제보자와 A간 카톡, 혹시 몰라서 보관해 온 허위보고서 사본을 제보 과정에서 밝히지 않을 수 있다. 제보자가 기업의 조사 의지를 확신하지 못하거나, 본인도 가담자로 몰려 책임을 지거나 배신자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지 걱정하여, 제보 이후 기업 대응을 일단 지켜보려는 경우 자주 생기는 일이다.
익명 제보를 받은 기업이 제보를 무시하고 조사를 중단함이 부적절한 것은 물론이다. 제보자에게 조사 개시를 위해 먼저 신원을 밝히고 면담에 응하라고 요구하거나, 불완전한 제보에 기하여 곧장 본격 조사를 진행하는 것도 좋지 않다. 제보자의 익명성 유지 의사를 존중해 불안감을 덜어주면서 자발적인 정보 제공 협조를 꾀하는 것이 최선이다.
예컨대, 제보를 받은 사내변호사가 이메일 회신으로 철저한 조사 의지를 밝히고 기밀 유지를 약속하면서, 사실관계와 증거에 관하여 최대한 구체적으로 문의하고, 조사 전후 어떠한 불이익도 없을 것을 확인해줘야 한다. 익명 투서를 받았다면 이메일 회신 같은 직접 교신은 어렵지만, 투서 직후 외부 조사 전문기관에 비위를 익명 신고할 수 있는 핫라인 제도를 시행하거나, 제보자가 속할 가능성이 높은 영업팀을 대상으로 비위 근절을 위한 특별 교육을 실행하고 팀원 전원에 대해 1대 1 고충상담을 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제보자가 사실 파악에 협조하고 나아가 신원을 밝히면서 적극 면담에 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조사팀은 제보자 진술을 서면화하고 향후 분쟁시 사용에 대해 명시적 동의를 받아야 한다. 배임 직원의 회유를 받아 제보자가 진술을 철회하거나 서면 사용을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면담 후 너무 자주, 또 민감한 부분까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제보자는 영웅 심리에서, 혹은 배임 직원과 반목 때문에 정보를 악용하여 조사를 방해할 수 있다. 조사 비밀을 실수로 유출하여 차질이 빚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기업은 제보자와 불가근 불가원 (不可近 不可遠)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다음은 형사 고소 문제다. 업무상 배임은 범죄행위다. 피해자인 기업은 언제든지 A를 형사 고소할 수 있고, 고소를 수리한 수사당국은 필요하다면 강제 수사권을 동원해서 진상을 밝히게 된다. 조사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 기업은 형사 고소를 할지, 한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내용으로 할지, 형사 고소와 관련해서 조사 목적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미리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A의 배임이 언론에 보도되거나 제보자나 고객사 고발 등으로 수사당국이 기업 의도와 무관하게 수사를 시작한다면, 기업 조사는 불필요하거나 증거인멸 시도로 오해 받을 염려가 있어 부적절하다. 조사 결과 상당한 의심이 가는데 A와 영업팀장 등이 완강히 모든 사실을 부인하여 기업 조사로 진상 규명에 한계가 있는 경우도 고소를 통한 강제수사가 필요할 수 있다. 이 경우 기업은 A와 연루 의심직원을 고소한 후 휴직 등으로 업무 배제시키고 수사 결과를 기다려 처분함이 적절하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기에, 예컨대 제보 직후 A를 형사 고소 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익명 제보자의 제보 내용이 어느 정도 믿을만한지 알 수 없는데 방어 기회를 주지도 않고 고소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고소 이후 수사에 관한 한 기업은 주도권이 없다. 따라서 조사 속도와 방향을 기업 사정에 맞춰 조절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 압수수색도 감수해야 한다. 수사당국 판단에 따라 피고소자인 A와 연루 의심직원 뿐만 아니라 외부 업체, 고객사와 그 담당자까지 수사대상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결과가 경영상 바람직한지도 생각할 문제다.
형사 고소는 기업이 조사를 수행하였음에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그럼에도 배임적 행위가 있었다고 의심할 상당한 혐의가 있으며, 고소로 인한 부작용도 감수할 만큼 사안이 중요하다고 판단할 때 실행할 수 있다. 즉, 형사 고소는 조사 초기에는 실행이 어려운 선택이므로, 기업은 우선 조사에 집중함이 좋다. 조사를 통해 규명된 사실은 향후 형사 고소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도 있다. 고소장의 고소사실은 최대한 상세하게, 그리고 증거와 함께 제시되어야 신속하고 효과적인 수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체 조사와 외부 변호사, 회계법인, 조사 전문가 등 제3자를 통한 조사 중 어느 방안을 채택할 것인지도 조사 계획, 설계 단계에서 정할 중요한 문제다.
제3자를 통한 조사는 전문성, 공정성이 장점이다. 그러나 외부자인 제3자가 기업 운영 현실을 이해하고 기업 조사담당자와 호흡을 맞춰 조사를 궤도에 올릴 때까지 시행착오를 겪는다. 향후 분쟁과 제도개선까지 내다본 엄밀하고 신중한 조사를 지향하므로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이 복잡해지고 공이 많이 든다. 조사 규모가 예상보다 확대되면 예산을 초과하는 높은 자문료가 발생한다.
자체 조사는 신속성과 비용 면에서 제3자 조사에 비해 우수하다. 그러나 전문성 부족, 사내 알력 등으로 조사 결과 공정성 시비 발생 위험이 크다. 조사 과정에서 비밀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조사대상이 되는 직원과 비위행위 범위가 확대되면 조사 능력상 한계가 올 수 있다. 제3자 조사에 비해 기업의 강력한 조사 및 비위 근절 의지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는 방안별 장단점을 이해하고, 기업 사정과 사안 특성에 맞는 결정을 해야 한다. 위의 사례에서는 자체 조사부터 시작하고, 제보자 접촉 후 사정에 따라 제3자 조사를 실행하는 방안을 고려할 만하다.
사내변호사가 제보자와 접촉하고 기초조사 하는 단계까지는, 내부 조사팀이 제3자 조언을 받으며 스스로 해결을 모색한다. 그 결과 제보에 근거가 없거나, A의 단독, 일회성 비위로 예상되면, 계속 자체 조사를 수행한다.
그러나 제보자 확인 결과, 영업 임원, 영업팀장 등 윗선이 관여되었거나 손실 규모가 큰 경우, 고객사 및 외부 업체와 분쟁이 예견되는 경우 형사 고소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는 내부 조사팀으로는 충분하고 공정한 조사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대면조사, 서류검토, 포렌직 등 본격 조사 단계부터 내부 조사팀과 호흡을 맞출 제3자를 선임, 조사를 이어간다.
조상욱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