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안중근·이봉창·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 한국인이라면 잊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어릴 적엔 순국선열의 이름과 업적을 일일이 외우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이 있기도 했습니다. 시험 범위 영역이란 압박에 입술을 씰룩거리며 책에 밑줄을 긋던 때가 생각나기도 납니다.
이제는 다양한 경험을 쌓아온 탓일까요. 그들이 포기한 것이 하나의 목숨에 그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독립운동가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곱씹을 때면 가슴 속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곤 합니다. 10대의 순수한 꿈, 20대의 찬란한 청춘, 30대의 소중한 가족.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바랐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순국선열들의 뒤편에서 이름 없이 칼과 총에 맞섰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은 어땠을까.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차가운 황무지에서 조국 광복을 염원하며 피를 흘렸을 독립군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전장에 나간 것일까. 부끄럽게도 지금껏 한 번도 접하지 못한 '광복군 아리랑'을 조명하고자 결심한 이유입니다.
하루의 평범한 휴일이 아닌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린 날을 기억하고자 국경일이 된 삼일절. 우리의 웃음이 누군가의 희생이었고, 우리의 현재가 그들의 희망이었음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되는 오늘입니다. 클래식이라는 틀을 잠시 내려놓고 독립운동가들의 굳건한 정신과 결연한 태도가 온전히 담겨있는 우리의 음악 '광복군 아리랑'을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총구 앞으로…'광복군 아리랑' 한국인의 기개를 담다광복군 아리랑은 1940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규군 한국광복군의 군가로 채택된 작품입니다. 광복군 제3지대 '지대가'의 작사가 장호강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광복군 성립과 동시에 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하며 군가로 불렸다고 합니다. 물론 전장에 나가지 않는 조회, 행군, 모임 시에도 자주 불린 대표적인 악곡이었다고 하죠. 작품의 형태는 1910년대 말부터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에 의해 불린 5절의 '독립군 아리랑'에 4절의 가사를 붙여 완성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현재는 광복군 아리랑과 독립군 아리랑이 통용되는 개념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광복군 아리랑은 주로 민요 '밀양아리랑' 악곡에 맞춰 불려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밀양아리랑의 세마치장단을 기본으로 3/4박자, 9/8박자의 3박 계통입니다. 그렇기에 광복군 아리랑 또한 경쾌함이 잘 살아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첫 박에 강박이 들어가다보니 독립군이 전장을 향해 전진할 때 부르는 행진곡으로도 적합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밀양아리랑 자체가 기본적으로 억양이 강하고 가락이 힘찬 편이었던 것도 독립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통상 군가가 무겁고 장엄한 곡조를 바탕으로 하는 것과 비교하면 광복군 아리랑은 아주 독특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낙천적인 성향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기질이 반영된 영역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목숨을 걸고 나서는 전쟁 속에서도 두려움보다는 동료에 대한 신뢰, 국가를 되찾겠다는 의지로 나아가는 민중의 고귀한 생명력이 그대로 드러난 부문입니다.
거센 악곡만이 전체 작품을 아우르는 분위기로 자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첫 박에 힘을 주는 대신 나머지 박엔 힘을 살짝 빼고 목소리를 흐려서 서글픈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성에 광복군 아리랑을 듣게 될 때면 한국인만 느낄 수 있는 '한(恨)'이 그대로 담겨있다고도 평가됩니다. 매우 원망스럽고 억울하며, 안타깝고도 슬픈 마음을 꼭꼭 숨기고 애써 웃음으로 서로를 다독이던 젊은 독립군들의 표정이 스치면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드리우기도 하죠.
밀양아리랑은 워낙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곡조였기에 뿔뿔이 흩어진 독립군들이 쉽게 따라 부르도록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단,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군 중에는 본조아리랑 가락으로 광복군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중국 동포 1세 차병걸씨가 본조아리랑 가락의 광복군 아리랑을 처음으로 국내에 전하면서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차병걸씨는 이 아리랑을 1980년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한국인 오병률씨에게 배웠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전국 또는 해외 여러 곳에서 광복군 아리랑이 불린 것을 방증합니다. 하나의 지역성이 대두될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하나의 곡조로만 광복군 아리랑을 분류할 순 없었던 것이죠. 다만 곡조와 장단의 다름에도 한민족의 공통된 것은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의 침략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개와 조국과 가족을 되찾겠다는 결의를 온전히 담아낸 가사가 그 영역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동포를 향한 애정, 일본 정부를 향한 분노, 결사 항전의 의지, 승리에 대한 간절한 바람, 독립에 대한 희망 등 복합적인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독립군이 젊은 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선택을 한 배경에 대해서도 넌지시 답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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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왕 말년에 왜 난리 나서 / 이천만 동포들 살길이 없네. (후렴)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 / 일제 놈 쳐부숴 조국을 찾자. (후렴)
내 고향 산천아 너 잘 있거라 / 이내 몸 독립군을 따라가노라. (후렴)
부모님 처자를 이별하고서 / 왜놈을 짓부숴 승리한 후에 (후렴)
태극기 휘날려 만세 만만세 /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리라. (후렴)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광복군(독립군) 아리랑 불러보세.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면 / 광복군(독립군) 갔다고 말 전해 주소. (후렴)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 불어요 / 삼천만 가슴에 광풍이 불어요. (후렴)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 배는 /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 배래요. (후렴)
동실령 고개서 북소리 둥둥 나더니 /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려요. (후렴)
-1999년 10월 한겨레아리랑연합회 한민족아리랑제전에서 발표된 박창묵 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논문 <중국 조선족과 아리랑> 및 국가보훈처 자료 인용
오랜 기간 구전으로 내려왔기에 가사의 일부 단어 또는 문장이 약간씩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틀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죠. 일본군을 모두 물리치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난 가사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국내와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윤세주 열사가 가사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윤세주 열사가 밀양 출신이고, 조선의용대 2인자였습니다. 그만큼 영향력 면에서 합당한 주장으로 제기된 것으로 보이나, 이를 증명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던 김학규 장군이 작사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도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특정인이 단독으로 가사를 붙인 것이 아닌 독립군 사이에서 익히 불린 가사가 하나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란 작사가 미상 설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광복군 아리랑에 대해 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이 모두 흩어지고, 매일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한글을 쓰는 것도 아리랑을 부르는 것도 금기시되던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의 기록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현재도 광복군 아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이름이 소리 없이 사라졌을지라도 계속해서 묻고 찾아내고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수많은 독립군과 광복군이 전장에 나아갈 때, 부모가 보고 싶을 때, 광복이 간절할 때, 동료의 죽음이 슬플 때. 그 모든 순간의 숨결이 남아있는 아리랑을 우리의 기억 깊이 남길 바랍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라는 높은 위상 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유일의 아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죠.
어떠한 아리랑보다 절실하면서 애절하고, 굳건하면서도 찬란했던 독립군의 정신이 아직 우리 곁에 살아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길. 오늘만은 이 일련의 바람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더 선명한 자국을 남기길 바라봅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