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상장 철회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거래소가 기술특례 상장기업의 심사 기준을 강화한 영향이다. 기업공개(IPO) 여건이 악화하면서 제약·바이오 업종의 투자 심리가 위축되고 기업들은 연구·개발(R&D) 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상장을 연기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2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합성신약 개발사 퓨쳐메디신은 최근 코스닥 상장심사를 자진 철회했다. 지난해 10월 예비심사를 청구한 지 4개월여만이다. 통상적으로 예비심사에는 영업일 기준 45일이 걸린다. 예정대로라면 올 초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심사가 계속 지연되자 철회를 택한 것이다.
퓨쳐메디신은 홈페이지를 통해 "4개월이 넘도록 심사에 성실히 임했지만 지난 17일 개최된 상장심의위원회의 결과에 따라 상장심사를 자진 철회하기로 했다"며 "최근 바이오 기업에 대한 시장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이런 결정을 내렸다"라고 밝혔다.
바이오 업계는 퓨쳐메디신의 상장 철회를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해 8월 코스닥 특례상장을 위한 기술성 평가에서 각각 A, A 등급을 받은 데다 HK이노엔에 기술수출한 경험도 있다는 점에서다.
이 회사는 정낙신 서울대학교 약학과 교수가 2015년 창업한 회사로 신약후보물질 FM101을 이용해 비알코올성지방간염(NASH), 녹내장, 만성신장 질환 치료제 등을 개발하고 있다. 정 교수는 길리어드의 코로나19 치료제 렘데시비르의 원료인 '뉴클레오사이드' 분야를 30년 이상 연구해온 전문가다.
FM101은 섬유화를 일으키는 A3 아데노신 수용체의 발현을 조절해 간 염증 및 섬유화를 억제하는 물질이다. 올 초에는 이 물질을 이용한 원발성 담즙성 담관염 치료제로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았다.
이밖에 코로나19 감염증, 급성호흡기증후군, 자가면역질환, 면역항암제 및 표적항암제, 지카 바이러스 등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개발 속도가 가장 빠른 것은 비알코올성 지방간염(NASH) 치료제다. 이 치료제는 유럽에서 임상 1상을 완료했으며 지난달부터 글로벌 임상2상에 돌입했다. 2020년 일부 적응증에 대한 국내 및 중국 사업권을 HK이노엔에 기술 이전하기도 했다.
퓨쳐메디신이 상장을 철회하면서 재무적 투자자(FI)들은 연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게 됐다. 이 회사는 2018년 60억 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를 받았고 지난해 프리 IPO(상장 전 투자 유치) 등을 통해 약 300억 원의 투자를 받았다. 주요 투자자는 한국투자증권, 한화투자증권, BNK벤처투자, 코오롱인베스트먼트와 우신벤처투자 등이다.
회사 측은 이르면 내년 임상 2상 결과를 가지고 증시 입성에 재도전한다는 계획이다. 현재 호주에서 진행 중인 녹내장 치료제의 임상2상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나스닥 상장사와 기술이전 협상을 진행 중이다.
IB 업계는 올해 제약·바이오기업들의 상장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한국의약연구소가 예심을 청구한 지 4개월 만에 상장 심사를 철회했다. 지난해는 엑셀세라퓨틱스, 노보믹스, 레몬헬스케어, 엔지노믹스 등 12곳의 제약·바이오 회사가 심사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들은 모두 코스닥 기술특례 상장을 추진하던 곳으로 예비심사를 청구한 지 3개월이 지나자 심사를 철회했다. 심사 과정에서 수익성, 사업성 및 재무 안전성에 대한 심사가 엄격해진 탓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거래소는 지난해 코스닥 기술특례 상장제도 평가항목을 확대하면서 시장성과 기술 진행 정도, 기술이전 이력 등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다. 심사 자료에 대한 평가 기준도 깐깐해졌다는 평가다.
IB 업계 관계자는 "거래소가 신약후보물질의 임상 단계와 기술수출 성과를 깊이 있게 따져보고 있어 심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며 "3개월 이상 심사가 진행될 경우 사실상 승인을 받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해 자진 철회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들도 제약·바이오기업을 외면하는 분위기다. 인공지능 혈액 진단 플랫폼 기업인 노을은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수요예측에서 32 대 1의 저조한 경쟁률을 보였다. 지난 21~22일 일반청약에서는 275억 원의 증거금이 유입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청약을 받은 비씨엔씨에 13조953억 원의 증거금이 몰린 것과 비교하면 흥행에 실패한 것이다.
노을은 한국투자증권과 삼성증권 두 곳에서 청약을 진행했는데, 평균 경쟁률은 각각 8.7 대 1, 28.6 대 1로 나타났다. 통합 경쟁률은 14.7 대 1이었다. 앞서 공모를 진행한 식물세포 개발기업 바이오에프디엔씨는 수요예측 경쟁률이 74 대 1, 청약 경쟁률은 5 대 1에 그쳤다. 상장 첫날인 지난 21일 주가는 공모가를 밑돌았다.
증권신고서 제출 이후 금융감독원에서 정정 요구를 받는 사례도 늘고 있다. 신약 개발 플랫폼 기업 보로노이는 다음 달 초 공모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자진 정정 신고서를 제출하고 일정을 3월 말로 연기했다. 정정 신고서에서 파이프라인의 개발 일정과 파이프라인별 사업 가치 등을 보강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