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국제결제 비중 0.1%…"한국이 기축통화국 된다? 비현실적"

입력 2022-02-22 17:47
수정 2022-02-23 02:43
지난 21일 열린 대선 주자 TV 토론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한국이 곧 기축통화국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국채를 얼마든지 발행해도 된다고 보느냐, 적정 국가부채 비율은 얼마로 판단하느냐’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질문에 답하던 중 나온 발언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학계에서도 ‘과연 한국은 기축통화국 자격이 되는가’ 하는 논란이 뜨겁게 불붙었다. 이 후보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국가부채 비율이 매우 낮다”며 “국가가 개인에게 떠넘긴 책임을 이제 국가가 져야 한다”고도 언급했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국채 발행에 따른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금융회사가 기축통화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보유하면 그 자체로 자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부채가 28조달러에 이르는 미국이 끄떡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축통화국 논란이 정부 재정지출 증가폭의 적정성과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축통화가 뭐길래 한국은행은 기축통화를 ‘여러 국가의 암묵적 동의하에 국제거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통화’로 정의하고 있다. 세계 외환거래 및 외환보유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달러화는 거의 유일한 기축통화로 인정받고 있다. 그다음으로 자주 거래되는 유로화,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 스위스 프랑화 등은 교환성 통화라고 평가한다. 교환성 통화 등의 범주에 들려면 △국제무역 결제 수단 △환율 평가 시 지표 △대외준비자산으로 보유 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원화는 이 같은 요건을 상당 부분 충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안에 충족될 가능성도 없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올해 1월 국제결제통화 비중을 보면 달러가 39.92%로 독보적 1위다. 그 뒤를 유로(36.56%) 파운드(6.3%) 위안(3.2%) 엔(2.79%) 캐나다달러(1.6%) 호주달러(1.25%) 홍콩달러(1.13%) 등이 잇는다. 한국 원화의 비중은 20위권 밖으로 0.1% 수준에 불과하다.

외환상품시장에서도 한국 원화는 변방에 머무른다. 국제결제은행(BIS)이 3년마다 발표하는 ‘세계 외환상품조사 결과’를 보면 2019년 원화의 거래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미국 달러화가 88.3%로 1위였고 유로화 32.3%, 엔화 16.8% 등의 순이었다.

각국의 외환보유액 지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작년 9월 말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59.2%였으며 유로 20.5%, 엔 5.8%, 파운드 4.8% 등이었다. 한국 원화는 이 비중이 0.2% 미만으로 추정된다. 한은 관계자는 “기축통화국은 위기에 견뎌낼 만한 경제 펀더멘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며 “세계 외환시장에서 원화를 기축통화라고 평가하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원화 기축통화 편입은 시기상조”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위기 때마다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는 한국의 경제 구조도 ‘기축통화국 논란’에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는 지적이다.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 3월 19일 원·달러 환율은 1285원70전까지 치솟고 코스피지수는 1400선까지 추락했다. 패닉에 빠진 세계 투자자들이 원화로 표시된 모든 자산을 투매한 결과다. 그 와중에 국내에서는 안전자산인 달러를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다. 단기 외화빚을 갚지 못한 증권사는 달러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부도설이 돌기도 했다. 기축통화국이라면 겪지 않을 상황이다.

기축통화 논란이 확산되자 민주당은 해명 자료를 통해 “이 후보의 주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 13일 내놓은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전경련은 ‘원화의 기축통화 편입 근거 제시-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 통화바스켓에 포함될 수 있는 5가지 근거’라는 리포트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전경련은 22일 보도참고자료를 배포하고 “한국 경제 안정을 위해 SDR 편입이 필요하다는 희망사항을 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령 원화가 SDR 통화바스켓에 편입되더라도 기축통화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현재 SDR은 IMF 회원국 간 공적 거래에만 일부 사용된다. 무역과 자본거래에서 SDR을 활용하지는 않고, 관련 금융상품도 없어 유동성 규모가 작다. 기축통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SDR 편입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 재정 더 풀어도 괜찮나‘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매우 낮다’는 이 후보의 주장 역시 기축통화 사용 여부에 따라 사실이냐 거짓이냐가 갈린다. 유혜미 한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기축통화는 안전자산으로 간주되고 국제적인 수요도 뒷받침되는 만큼 해당 국가는 국가부채를 상대적으로 높게 유지할 여력이 있다”며 “(한국과 같은) 비(非)기축통화국은 국가부채가 크게 증가하면 국가신용도가 하락하거나 환율 상승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이 초래될 수 있으므로 대체로 기축통화국에 비해 국가부채 비율이 낮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선진국의 부채 비율을 살펴보면 일견 이 후보의 주장이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국가부채 비율이 252.3%에 이르는 일본을 비롯해 미국(130.7%) 프랑스(113.5%) 영국(107.1%) 등 대부분 선진국이 국가부채 비율 100%를 훌쩍 넘기고 있어서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기축통화나 준(準)기축통화로 인정받는 달러와 유로화, 파운드화를 사용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국제거래 비중이 미미한 비기축통화국 17개 중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 순위는 9위로 결코 낮지 않다.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은 55.1%(IMF 통계 기준)로 스웨덴(39.9%)과 칠레(37.3%)보다 많고 유로화를 사용하는 독일(69.8%)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마저도 위기 시 정부가 상환해야 할 공기업 부채는 빠져 있다. 한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공공부문이 공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를 추가할 경우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은 20%포인트가량 높아진다. ‘IMF, 국가채무 비율 85% 권고’는 거짓이 후보가 TV 토론에서 언급한 ‘IMF가 한국에 국가채무 비율을 너무 낮게 유지하지 말라고 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IMF는 2017년 한국 정부와의 연례협의에서 ‘위험한 수준 이하로 안정시키기 위한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선진국의 경우 85%’라고 제시했다. 이 후보는 해당 사실을 들어 현재 국가부채 비율을 감안할 때 GDP의 30%까지 추가 재정 지출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일반적인 기준치를 제시했을 뿐 한국에 85%까지 지출을 늘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며 “더욱이 IMF가 한국에 국가채무 비율을 몇%로 유지해야 한다고 권고한 사실 자체가 없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정책 실패가 가계부채 폭증 주범늘어나는 가계부채를 근거로 ‘정부가 더 돈을 써야 한다’는 주장도 실제와 거리가 멀다. 지난해 2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104.2%에 이른다. 국제금융협회가 조사한 37개국 중 유일하게 가계부채가 GDP보다 많다. 이에 대해 이 후보 캠프는 “코로나19 등 비상시기에 정부가 돈을 충분히 풀지 않아 국민이 빚을 내 생활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가계부채 급증의 가장 큰 원인은 주택 구입 및 전세대출 증가에 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9년 전세를 포함한 한국의 주택담보대출은 GDP 대비 61%에 이르렀다. 2008년 52%였던 수치가 뛴 것으로, 미국 스페인 등 상당수 조사 대상 국가에서 관련 비율이 줄어든 것과 대비된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지원이 적어서가 아니라 부동산 정책 실패로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만능주의 함정에서 벗어나야”전문가들은 결국 재정만능주의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정을 투입하면 복지는 물론 성장까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복지 지출이 정부 지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재정 투입을 늘린다고 성장이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재정 투입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재정승수 효과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2018년까지 1보다 높았던 재정승수(1=재정 투입만큼 성장)는 2019년 이후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는 보건·복지·고용 등 고정비용에 해당하는 재정 투입이 늘어난 데 따른 결과다.

노경목/김익환/김소현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