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산 1억원짜리 펀드를 운용하는 A운용사(자본금 5억원)는 LG에너지솔루션 상장을 앞두고 진행된 공모주 수요예측에서 9조5625억원(3187만5000주)의 주문서를 제출했다. 공모주 4250만 주 가운데 기관에 배정된 75%(3187만5000주)를 모두 받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역대 가장 치열한 청약이 예고됐던 만큼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한 ‘꼼수’였다. 실제 수요예측에 참여한 국내 680개 운용사 가운데 A사처럼 최대치(9조5625억원)를 적어낸 곳은 총 585곳. LG에너지솔루션 기관 수요예측에서 1경5203조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주문금액이 나온 배경이다. 뻥튀기 청약 실체 살펴보니13일 한국경제신문이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을 통해 KB증권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LG에너지솔루션 기관투자가 수요예측’ 자료를 입수, 분석한 결과 사상 최대 청약 이면에 ‘뻥튀기 청약’ ‘고무줄 배정’이 난무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당국의 방치 속에 대부분 기관투자가가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해 허수 청약에 나서면서 웃지 못할 대기록을 만든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 청약에는 1908곳의 국내외 기관투자가가 참여한 수요예측 경쟁률이 2023 대 1. 국내 기업공개(IPO) 역사상 가장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들이 써낸 돈은 1경5203조원에 달했다. 업계에선 기관투자가의 묻지마 베팅이 빚어낸 촌극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정상적인 주문이 이뤄졌다면 달성이 불가능한 수치라는 지적이었다. 참여 운용사의 86%가 9조5625억원을 적어내 벌어진 일이다. 680곳의 자본금 총액은 11조500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뻥튀기 청약을 통해 A사가 받은 LG에너지솔루션 주식은 26주. 정직하게 주문했다면 받아내기 어려운 수량이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치열한 경쟁이 뻔한 상황에서 한 주라도 더 받기 위해 꼼수임을 알면서도 최대치를 적어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680곳의 기관투자가는 평균 8641주를 배정받았다. 가장 많은 공모주를 받은 기관은 펀드순자산 1조571억원의 하이일드펀드 운용사로 20만6715주가 할당됐다.
들쭉날쭉한 배정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주관사, 금융투자협회는 “공정하게 배분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배정이 많았다. 수요예측 자료에 따르면 9조5625억원의 주문서를 낸 자본금 1억원, 펀드 순자산 27억원 규모의 B운용사는 900주를 받았다. 같은 주문을 낸 C운용사(자본금 35억원, 펀드순자산 15억원)는 500주를 받았다. 반면 30억원어치밖에 주문하지 않은 C운용사(자본금 25억원, 펀드순자산 57억원)에는 487주가 배정됐다. 자본금과 순자산, 주문금액 등 정량적 평가 기준 가운데 어느 것도 실제 배정에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은 셈이다. 한 증권사 IPO 담당자는 “신청 수량과 순자산 규모에 비례한다고 하지만 주관사 재량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며 “공모가 산정, 주식 배정까지 이틀 만에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관들의 허수 청약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꼼수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업계에선 뻥튀기 청약을 막기 위해 꼼수를 가려낼 전산 시스템 구축과 허수 청약이 적발됐을 경우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현재 ‘증권 인수업무 등에 관한 규정’ 등 관련 규정에 기관투자가가 적어낼 수 있는 주문 금액의 상한은 없다. 공모운용사의 경우 펀드 규모(순자산가치·NAV)의 10%만 청약하는 10%룰이 적용되지만 사모펀드는 강제규정이 없다. 청약 시 허위사실을 명기해도 처벌 강도는 낮다. 예를 들어 A운용사가 허위로 수요예측에 나선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현 규정상 배정주식(26주)에 공모가(30만원)를 곱해 그 금액이 1억원을 넘지 않으면 6개월간 수요예측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한 규제가 전부다. 1억원이 넘더라도 5000만원이 추가될 때마다 1개월씩 제한 기간이 늘어나는 데 불과하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운용사들이 얼마든지 허위로 자본금과 펀드 순자산을 기입할 수 있는 데다 주관사들이 이를 일일이 걸러내기 힘든 구조”라며 “금융당국이 나서 전산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기자본 또는 순자산 규모에 따라 일정 비율 이상 청약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또 개인투자자처럼 청약금액의 50%를 증거금으로 걷자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하지만 업계는 부정적이다. 불황기에 IPO시장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박재원/서형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