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자금이 주식 등 위험자산에서 안전자산으로 쏠리는 ‘역(逆)머니무브’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 한 달간 5대 은행의 총 원화 수신액, 자산운용사의 머니마켓펀드(MMF),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 잔액이 총 58조원 이상 불어났다. 예상보다 빠른 미국의 금융긴축 속도와 글로벌 증시 침체, 코인시장 약세 등이 지속되면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된 영향으로 분석된다. 자금의 ‘단기 부동화(浮動化)’ 심화
6일 은행권에 따르면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올 1월 말 기준 원화 수신액은 1788조5520억원으로 지난해 12월 말 대비 34조1929억원 증가했다. 수신액 증가에 영향을 준 건 정기예금과 요구불(수시입출금)예금이다. 각각 전년 말 대비 11조8410억원, 9조1311억원 불어났다. 은행 수신은 거래상대방으로부터 거둬들인 자금의 총합을 말한다. 각종 예·적금과 원화표시 금융채 발행액, 양도성예금증서(CD) 순발행액(발행액-환수액), 환매조건부채권(RP)매도액으로 구성된다. 은행 원화 수신 잔액은 통상 전월 대비 ±1% 안에서 움직이는데 지난달에는 1.9%나 늘어난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의(Fed)의 조기 긴축 우려로 미국과 국내 증시가 연초에 하락한 점이 정기예금 선호 현상을 키운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지난달 중순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직후 은행들이 즉시 예금 금리를 올리는 조치를 단행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 단기 부동자금인 은행 요구불예금 잔액도 지난달 말 기준 735조7012억원으로 한 달 만에 9조원 이상 증가했다. 은행들은 주식, 코인시장에 다시 돈을 투입하길 주저하는 사람이 늘었다는 의미라고 분석한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요구불예금 증가는 금융소비자들이 그만큼 새로운 투자를 꺼리고 있다는 뜻이고, 정기예금 증가는 고수익 추구를 포기한 투자자가 늘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시중 자금의 ‘단기 부동화’ 현상은 MMF와 CMA 잔액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MMF와 CMA 잔액은 각각 158조원, 69조원으로 전년 말에 비해 22조원, 4조원 증가했다. 저축은행에도 돈 몰려시중은행보다 0.5~1%포인트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 정기예금은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특판예금이 출시 즉시 ‘완판’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준 저축은행의 수신 잔액은 96조8178억원으로 1년 전(73조9025억원)과 비교해 31% 증가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주식, 암호화폐, 부동산시장이 최근 맥을 못 추면서 ‘예테크(예금+재테크)’가 각광받고 있고 시중은행보다 저축은행에 돈이 더 빨리 쌓이고 있다”고 말했다.
저축은행에 대한 가계대출 총량규제가 지난해 21.1%에서 올해 10~15% 수준으로 강화됐다. 대출을 크게 늘릴 수 없게 되자 일부 저축은행은 최근 들어 예·적금 금리를 되레 낮추고 있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대출해 주고 이자 수익을 얻거나 투자로 이익을 올려야 하는데, 자금 운용이 마땅치 않다는 게 고민”이라며 “부동산시장이 하향세를 나타내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도 여의치 않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대출 규제가 맞물리면서 금융회사에 돈이 쌓여도 대출해 주지 못하는 혼란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통화긴축 속도가 빨라 위험자산에서 빠져나온 자금이 은행 예·적금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며 “당분간 안전자산으로 몰리는 현상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대훈/이인혁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