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국가 유치과학자 1호 김재관

입력 2022-02-06 17:10
수정 2022-02-07 01:14
그가 서울대 기계공학과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피란지 부산의 전시연합대학교에서 강의를 듣던 그는 미군 통역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당시 부산에는 미군의 박격포와 장갑차, 탱크 등이 총집결했다. 이들 중화기는 모두 특수강으로 제작돼 있었다.

이때 그는 깨달았다. ‘우리도 특수강을 생산할 수 있는 종합제철 국가로 성장해야 한다.’ 졸업 후 독일(서독) 초청 장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한 그는 뮌헨공대로 유학을 떠났다. 5년 만에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최대 철강사 데마크에 입사해 최첨단 기술까지 익혔다.

1964년 12월, 차관을 얻으러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유학생 간담회에서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건넸다.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이었다. 대통령은 감격해서 그의 손을 놓지 못했다. 대한민국 산업발전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3년 뒤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귀국한 그는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의 설계도를 그렸다.

‘해외 유치과학자 1호’ 김재관.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창립 멤버로 연산(年産) 103만t 규모의 세계적인 종합제철소 설립을 주도했다. 그는 종합제철소가 있어야 조선과 자동차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를 맡아서는 고유모델 자동차산업 육성안을 제시했다. 각계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독대하면서까지 이를 관철했다. 그의 제안으로 탄생한 국산 첫 승용차가 현대자동차의 ‘포니’다. 이때 ‘자동차 차관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아이디어와 지원 덕분이었다.

그는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에 꼭 필요한 국가표준까지 수립했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를 신설해 1~2대 소장으로 ‘대한민국 표준시’와 ‘국가표준제도’(헌법), ‘국가표준기본법’ 명문화를 이끌었다.

이렇게 100년 앞을 내다본 혜안과 땀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도 그는 2017년 타계할 때까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덜 알려졌다. 다행히 그의 평전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홍하상 지음, 백년동안)이 나와 ‘한국 산업화의 설계자’를 제대로 조명할 수 있게 됐으니 반가운 일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숙연해지는 대목이 많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