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4일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난데없이 한복을 입은 여성이 오성홍기를 들고 나타났다. 식전 영상에는 한복 입은 사람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김치 등을 먹는 모습까지 나왔다. 한국 문화를 중국의 57개 ‘소수민족’ 중 하나의 문화라고 전 세계에 공표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관중석에는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한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한 국가의 대표가 아니라 ‘소수민족 대표’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 장관은 “공식적인 항의는 현재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문화가 확산하는 과정으로 보고 자신감, 당당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궤변까지 내놨다.
외교부 당국자는 “문화 관련 논쟁 동향을 모니터링해오고 있다”며 “중국 측에 고유 문화 존중과 문화적 다양성에 기초한 이해 증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속 전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일방적 ‘문화 침탈’이 양측 입장 모두 일리 있다는 ‘논쟁’으로 둔갑한 것이다. 박병석 국회의장은 “중국 14억 명 중 1억2000만 명은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이라며 “상호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한술 더 떴다.
한국은 미국 영국 일본 호주 등 14개국이 참여한 베이징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체부 장관과 국가 의전서열 2위의 국회의장까지 보냈다. 그런데도 돌아온 것은 면전에서 이뤄진 모욕뿐이지만 중국에 항의하겠다는 말조차 없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과거사 문제에 엄격한 ‘칼날’을 들이대왔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일본 외무상과의 통화에서도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한 비판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대한 정부의 일관된 자세에 많은 국민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칼날은 중국 앞에선 무뎌지다 못해 녹슬어버린다. ‘과거사 왜곡’ 차원을 넘어 과거사 전체를 침탈하려는 움직임에도 중국을 향해야 할 칼끝은 일본을 향하기도 한다. “한복 논란은 도쿄올림픽 때 영토 문제(공식 홈페이지 표기)와는 다르다”며 “대한민국을 침략했던 나라가 오히려 영토 관련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황 장관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한복은 ‘한푸’, 김치는 ‘파오차이’, 윤동주는 ‘조선족’이라는 중국의 저질스러운 문화 침탈은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이번 사태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사태 예방에 실패한 정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조차 거부하고 있다. 국민들은 “당당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황당한 훈계가 아니라 중국 앞에서 당당한 정부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