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업·K콘텐츠의 역대급 콜라보

입력 2022-01-05 17:45
수정 2022-01-06 00:16
영화 ‘라라랜드’로 유명한 미국 영화 제작사 엔데버콘텐츠가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오자 CJ ENM은 인수협상단을 꾸려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매각사 측을 만나 자기소개를 하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우리가 영화 ‘기생충’을 만든 회사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한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은 매번 자신을 알리는 단계부터 고역이었다. 산업화 초기인 1970년대는 특히 그랬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조선소를 세우려고 외국 은행을 돌았지만 회사는 내세울 게 없었고, “봐라,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배를 잘 만들었다”며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이밀던 시절이었다. "기생충 만든 회사" 한마디에…20~30년 전까지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현대·삼성·LG·대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국내 대기업은 글로벌 M&A·투자 시장에서 무명에 가까웠다. 2000년대 들어 국내 기업과 투자사들의 글로벌 진출이 가속화됐지만 해외 합작이나 투자가 쉽지 않았다.

그때 국내 기업들을 해외에 알리는 데 쏠쏠한 역할을 한 것이 프로스포츠 중 처음으로 한국이 전 세계를 호령한 골프였다. 2011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타이틀리스트로 유명한 골프용품 업체 아쿠쉬네트를 인수할 때 얘기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미래에셋’이란 회사명에 아쿠쉬네트 임직원과 주주들은 미심쩍어했다. 미래에셋은 당시 아시아 선수 최초로여자 세계랭킹 1위를 달리던 신지애의 사진을 내밀었다. 모자엔 미래에셋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게다가 파트너는 골프웨어 분야에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던 글로벌 4위 스포츠 브랜드 휠라였다. 아쿠쉬네트가 인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인 이유다.

앞서 2006년 두산중공업이 영국의 발전소 보일러 기업 밥콕(현 두산밥콕)을 인수했을 때도 현지 임직원 사이에 반발이 일었다.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옛 주인 일본 미쓰이그룹에 비해 두산은 대부분 직원에게 낮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동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두산이 영국이 자랑하는 골프대회 디오픈의 메인 스폰서라는 게 알려지면서다. 네이버와 블랙핑크의 합작기업들과 ‘K소프트파워’의 협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골프와 게임 그리고 드라마 부문에서 막 발아하기 시작한 ‘한류’가 주도했다. 처음엔 기업을 알리고 힘을 보태는 수준이었다. 그 후 국내 문화·엔터산업이 전방위에서 세계적 반열에 오르면서 시너지는 극대화됐다. 지난해는 그 정점이었다. 기업과 투자사들은 콘텐츠와 플랫폼 등에 역대 최대 규모를 투자했고 이에 화답하듯 ‘오징어게임’, BTS로 대표되는 K소프트파워는 국내 소비재 브랜드를 세계에 알렸다.

지난해 토종 메타버스 플랫폼인 제페토가 세계에서 무려 2억40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 것은 시너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네이버가 초기 시장에 자금을 쏟아부어 좌판을 깔았고, 블랙핑크가 K팝 팬들을 열광시키며 손님을 끌어모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정부의 대표적 성과로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언급하며 “수많은 K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그 K열풍은 단기간 형성된 게 아니다. 수십 년간 기업과 문화 분야 간 켜켜이 쌓아온 협업의 결과물이다. 기업은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려 문화산업을 키워냈고, 그 콘텐츠들은 세계적 아이콘이 돼 국내 기업의 글로벌화를 이끄는 첨병이 됐다. 올해도 글로벌 시장에서 K기업들과 K소프트파워의 멋진 ‘콜라보’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