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산업혁명이 왜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른바 ‘니담의 퍼즐(Needham puzzle)’ 풀이는 이미 다 나와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관점, 고등교육, 혁신과 확산, 특허제도, 도시의 역할 등이 영국과 중국의 운명을 갈랐다는 것이다. 중국이 영국발(發) 산업혁명을 훗날 동양으로의 진격을 알리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왜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됐느냐도 마찬가지다. 당시 프랑스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자국을 빠져나간 기술 인력이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미국 경제사학자 조엘 모커는 이웃 국가들의 기술혁신을 위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자기만족에 빠져 외부 위협을 무시한 강대국의 몰락은 역사가 ‘카드웰의 법칙’으로 알려주고 있다. 과거엔 외부 위협이 전쟁이었고 선전포고가 있었다. 지금은 외부 위협이 기술이고 선전포고가 없다. 미·중 충돌이 바로 그렇다.
미국과 중국은 인공지능(AI), 차세대 이동통신, 양자정보과학, 반도체, 바이오, 그린에너지 등 21세기 핵심 기술을 놓고 물러설 수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미국은 중국이 10년 안에 모두 따라잡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10년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전략이다. 역사는 훗날 지금의 미·중 충돌을 ‘거대한 10년 기술전쟁’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새로운 산업혁명 때마다 국가 간 ‘대분기(great divergence)’ 속에 주도국으로의 쏠림이 일어났다. 코로나19가 신기술 수용을 가속화하면서 미·중으로의 쏠림이 확연하다. 세계 총생산(GDP)에서 미·중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33.2%, 2020년 34.2%, 지난해 34.7%로 상승했다. 미·중으로 유입되는 글로벌 투자자금은 2019년 23%에서 2020년 52%로 급등했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사)으로 가면 쏠림이 더 심하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2021년 10월 8일 기준 세계 유니콘 기업 936개 중 미·중 비중은 69.1%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은 글로벌 가치사슬(GVC)이 미·중의 국가가치사슬(NVC)로 쪼개진다는 것이다. 미국(AVC: America value chain)이냐, 중국(CVC: China value chain)이냐다. 미국과 동맹을 맺은 나라가 많지만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1위인 국가는 더 많다. 문제는 미·중이 차세대 산업·기술을 중심으로 자국 공급망을 강화할수록 쏠림이 커지는 반면, 다른 나라들은 주변부로 전락할 위험성도 덩달아 커진다는 점이다.
미·중 양쪽에서 초대를 받고 있는 국가나 기업은 당장은 기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중이 자국 중심 공급망을 완성하는 순간 초대의 가치가 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다른 나라들로서는 미·중 밖에서 얼마나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는 NVC를 구축할 수 있느냐가 생존과 지속 성장의 관건이 되고 있다.
혁신역량이 없는 국가는 미·중 쏠림에 흡수될 공산이 크다. 반대로 독자적인 혁신역량을 확보하는 국가는 기회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
일본경제연구센터는 향후 미·중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시나리오를 예상했다.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2022 세계 경제전망’에서 이 시대를 ‘미국 헤게모니의 종말’로 규정했다. 미·중 틈바구니에서 생존 공간을 찾아낸 나라들이 손잡고 ‘제3의 축’으로 부상하면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전략적 존재성’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테크노내셔널리즘(technonationalism·기술 민족주의)’이 귀환했다. 혁신율은 혁신역량과 속도의 함수다. ‘혁신의 정치학’은 경쟁국의 혁신을 큰 위협으로 느끼는 나라는 내부 갈등을 해소하고 규제를 풀어 혁신율이 올라가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내부 갈등과 규제에 짓눌려 혁신율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때마침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2’가 열리고 있다. ‘총성 없는 기술전쟁’에서는 경쟁하는 국가나 기업이 신기술을 먼저 개발하거나 상용화하면 그게 곧 선전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