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지만 달력의 첫 장이 비뀐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갖는다. 나의 경우? 필자는 휴식과 재충전이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휴식이 옛날 이야기처럼 여겨지지만, 곧잘 재벌 총수님들이나 각국 수장들이 이른바 '신년 구상'을 위해 스위스로 떠난다느니, 캔터키에 있는 가족 농장에 간다느니, CES를 참관한다든지 하는 일들은 곧잘 신문에서 볼 수 있다. 나도 그런 거창한 이벤트는 아니지만 몇 년 전부터 눈 딱 감고 단란한 가족들이랑 해마다 2주씩 여행을 간다. 물론 지금 이 코로나 시국에도 하와이에서 소나기와 싸우며 해변과 스케이트파크 그리고 골프장을 전전하고 있다. (추위에 떨고 계시는 여러 독자분께 심심한 메롱의 말씀을 올린다.)
물론 늘 나의 연말연시가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나도 한 때 휴가는 불안과 죄악의 근원이며, 몇 년간 휴가 일수가 얼마나 쌓였는지를 곧잘 자랑삼아 이야기하던 '꼰대'였다(뭐 물론 지금도 꼰대다). 자 그럼 도대체 왜 필자는 갑자기 휴가 예찬론자가 되었을까? 아니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Work Hard & Play Hard' 예찬론자가 되었을까? 이는 휴가가 주는 전략적 의미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우선은 여러분들이 이끌고 있는 조직에게,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리더(가 되고싶은) 여러 독자분들께 말이다.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내가 열흘이 넘는 장기 휴가를 가기 시작한 것은 홍콩에서 외국 금융기관 소속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겉으로는 직원들의 '워크라이프 밸런스 유지'라는 그럴 듯한 명목이지만 최소 2주간 절대로 사무실에 들어와서도, 그리고 컴퓨터를 access해서도 안되는 엄격한 휴가였다 (물론 야금야금 해야했지만). 얼마 안 가 알아낸 것은 그 2주간 휴가자들을 대상으로 선별적으로 감사 및 내사를 진행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식민지배를 체계화한 영국계 금융기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회사도 알차게(?) 휴가기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실제로 감사를 해서 뒤져내 누굴 혼낸다기보다, 매년 한 번씩 누군가가 나의 컴퓨터를 그리고 전화 기록들을, 카드 사용 내역을 샅샅이 뒤져본다는 사실(혹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절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지만 누가 무슨 잘못이 털려서 어떻게 되었다는 묘한 불안감, 그럼에도 나의 소중한 휴가는 보호된다는 안도감이 어우러져 결국에는 조직에 충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묘하게 갖게 만드는 게 제일 큰 의도가 아니었던가 싶다.
나의 경우, 이렇게 매몰차게 감사를 하진 않지만(나는 좀 더 대놓고 감사를 하는 스타일이다), 하루 이틀이 아닌 장기 휴가기간을 독려하면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았다. 사례를 들어보자.
필자가 수 년간 컨설팅을 하고, 투자도 했던 X그룹은 수 십년간 승계가 이루어지면서 형제간 그리고 사촌간 다소 복잡한 오너십과 경영 의사 결정 체계를 갖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친척간 그리고 세대간 긴장관계가 없을 순 없던 터라 어떤 계열사는 누구한테, 어느 정도의 의사결정은 누구한테까지 받아야하는지 시시콜콜한 프로토콜이 있었고, 각각의 라인과 의사 결정자를 적절히 찾아내지 못하면 조직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당시 그 그룹의 한 계열사에 투자를 진행하고 있던 나는, 의도치 않게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실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어떤 자산과 어떤 인력을 분리해 올지 한참 협상 중에 우리는 해를 넘기게 되었고, 당시 투자 후 회사를 경영해주기로 약속했던, 그리고 내 눈에는 99점짜리 대표이사로 보였던 카리스마 넘치는 계열사 A대표이사가 급작스런 사유(뭐 사고에 가까웠지만)로 회사를 떠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런 짱돌이 떨어진 건데, 투심위에서 잔뜩 추켜세워두었던 핵심 경영진이 없어져버리고 나는 '멘붕'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룹의 태도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말이 맞긴 하지만) 매각하기 전까지는 매각된 게 아니고(즉 여전히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고), 그룹에서는 이런 일들을 대비해서 A대표의 공식 사임일 날 다른 계열사에서 재무를 담당하던 뉴페이스 B를 떡하니 대표로 임명한 것이었다. 회장님을 찾아가서 읍소라도 해보려 했던 나의 전략도 틀어져버렸는데, 이른바 신년 외유를 위해 저멀리 유럽으로 떠나버린 상황이었다. 아니 그런데도 이 그룹은 태연하게 이렇게 큰 의사결정을 덜컥 딜 중에 해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아직 어리고 경험이 적었던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고 딜은 내 손을 빠져나갔다. 그룹이랑 다른 딜들을 이야기하면서 몰래 곁눈질로 그 사업부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듣곤 했었다. 2년쯤 지나서인가, 결국 다른 펀드가 이 사업부에 투자를 하게 되었다. 무려 우리가 처음 고려했었던 벨류에이션의 2.3배가 넘는 금액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조직의 연속성 (succession plan)
그 사업부는 새로운 B대표 체제에서 2년 만에 2배 가까운 성장을 이뤄냈다. 시장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내 눈에는 너무 샌님같고 좀 까칠해 보였던 그 '재무쟁이' 신임 B대표가 알차게 조직을 이끌어 온 것이었다. 당시 급하게 회사를 떠났던 A대표이사는 카리스마 200점짜리 리더였지만, 그 밑의 영업, 마케팅, 생산 담당 허리들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조직은 새로운 리더를 맞이할 준비가 너무 잘 되어 있었고, 각 세부 조직들은 이미 충분하게 델리게이션, 즉 역할 분담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꼼꼼히 목표를 쪼는 스타일의 신임 B대표가 오자 조직의 역량이 오히려 배가된 것이었다. 누가 어디까지 의사결정할 지 정해둔다는 것은, 오히려 누군가가 밑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끌어온다는 의미였고, 대표님 혹은 회장님 한 분이 모든 의사결정을 도맡아서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나는 다재다능한 'multi functional cxo'를 선호하게 되었고, 종국적으로는 '작은 대표' 스타일의 전략을 추구해오고 있다. 이런 전략은 조직의 연속성, 그리고 속도감 있는 세대교체를 가능하게 하는데, 이른바 전략과 생산도 아는 CFO, 재무와 인사도 아는 COO 등을 대표이사와 함께 꾸림으로써, 유사시 대표이사를 대체하거나 혹은 다음 투자에서 대표이사로 쓸 수 있는 인재들을 육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비단 CXO 레벨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포트폴리오 회사 중에서도 최초 투자 시점에서 차장 혹은 팀장을 맡은 분들이 과감히 CXO로 올라가서 팀장급이지만 임원의 업무를 하고 있는 케이스가 아주 아주 많이 있다.
이런 케이스는 (승진에 대한 그리고 더 큰 역할에 대한 욕망이 있는 직원들이 있는) 조직에 활력을 불어일으킨다. 반면 부작용도 있다. 필자가 수 년 전에 투자한 회사는 투자 1년 만에 대부분의 창업 공신이 회사를 떠나버렸는데, 이른바 "제발 귀찮게 하지 마세요" 스타일의 직원들을 솎아내는 멋진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deligation은 필자가 운영 중인 회사의 핵심 평가 기준이기도 하다.
그럼 어떤 조직이 이런 연속성을 미리 준비하고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자, 비법 공개의 시간이다.
내가 새로운 회사나 조직을 만날 때 그 리더에게 물어보는 황당하고 무례한 질문이 하나 있다. "대표님, 대표님 유고 시 누구 누구를 다음 대표로 하면 되나요?" (이게 좀 현타 질문인데, 스스로에게 해보자. 0.1초만에 답이 안나오면 그 조직은 준비가 안된 것이다!)
10여년 전 당시 투자 검토를 하고 있었던 한 기업의 회장님에게 이 질문을 했을 때의 황당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무슨 말이요 김대표. 이 회사가 곧 나고, 내가 곧 이 회사인데." 공교롭게도 이 회장님은 번듯한 아들도 있었고, 당시 나와 수 개월간 같이 일을 해오고 있었던 A++급 CFO도 있었다. 그분을 대표로 앉혀도 될지 궁금해서 물어본 대답에 생각도 못한 답을 들은 나는 곧 회장님이 없이는 회사의 적절한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점, 반면에 이 회장님은 마음은 떴는데 아들에게 물려주거나 상장할 준비는 안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물론 결국 이 딜도 퍼지게 되었고, 그 회사는 쇠락의 길을 아직도 서서히 걷고 있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좀 그렇긴 하다. 자 그럼, 이거 말고 순한 맛은 없나? 우리들이 몸 담고 있는 조직에서 내일 당장 할 수 있는 방법 - 당연히 있다. 바로 '장기 휴가'를 줘버리는 것이다.
장기 휴가라면 대체로 1주가 넘는 휴가일텐데, 그럼 우리 모두가 속한 비지니스의 세계에서는 그 빈자리가 금방 표가 난다. 필자의 경우 수 년간 여러 포트폴리오 회사들을 경험하다보면 대략 둘로 나뉜다. (1) 백업이 확실하게 있어서 술술 굴러가고 휴가 간 임원은 이메일 카톡만 간간히 오는 경우, (2) 휴가인데도 시시콜콜 직접 들어와서 일일이 진두지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 물론 더 극단도 있다. (3) 밑에 팀들이 알아서 챙기고 일은 돌아가는데 간간이 '빵꾸'가 나고 팀원들이 슬슬 투정을 부리는 경우, 마지막으로 (4) 아에 장기 휴가를 거부하는 경우.
당연히 (1)의 케이스가 제일 좋은데 (2)도 조직의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다. 시시콜콜 챙긴다는 소리는 밑에 직원들한테 이것저것 미션을 줬다는 뜻이고, 이렇게 시달리면 조직은 단단해진다. 그 와중에 리더는 휴가를 갔으니 쉴 줄도 안다는 뜻이다. (3)이 단기적으로는 제일 진상인데, 일단 부하들한테 존경을 못 받고, 그럼에도 일이 돌아간다는 소리는 본인이 잘려도 장기적으로 보면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나마 좋은 점은, 이렇게 빈자리를 허겁지겁 메꾸다보면 밑에 팀원들 중에 슈퍼스타가 탄생하고, 나는 이렇게 탄생하는 슈퍼스타들을 맞이하는 것이 길게 보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럼 제일 나쁜 건? 딩동댕, 휴가를 안 가는 리더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얼마나 좋은 리더인가!!). 휴가를 안 간다는 것은, 밑에 직원들도 휴가를 가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고, 손에서 일을 놓치 못하겠다는 불안증의 방증이다. 이는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뺏는 것이다. 엄마가 다 큰 아들 대학교까지 차로 태워주고 밥도 떠먹여주는 것이다.
충분히 뉘우치셨나? 반성하셔라, 이 시대의 꼰대 리더님들. 자, 좋다. 그럼 그 리더들은 일상을 떠난 휴가에서 실컷 살찌고 퍼 자고 돈만 쓰다가 오면 되는가? 그럼 폭망이다. 그럼 뭘 해야하는가?
식상한 표현이지만 하루하루 챗바퀴 삶을 사고 있던 우리들은 일상에서 떠나서 큰 그림, 숲, 지구, 우주, 미래를 봐야한다.<i>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업에서 새로운 먹거리가 있을지, 이 사업을 좀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지, 이것만이 내 길일지, 나는 이걸 언제까지 하고 싶을지, 그리고 당연히 내가 아닌 조직의 누군가가 내 일을 맡아 할 수 있을지. </i>이런 생각 없이 앞만 보고 가면 이제는 존망이 위협을 받을 사업들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전통 제조업 그리고 유통업만이 겪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과감하게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그만한 배짱과 조직이 나에게 있는지, 어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즉, 새로운 것에 대한 지식이 나한테 있는지. 이런 게 없다면 앵글을 바꿔서 일이 아닌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지, 나는 언제까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런 사고야말로 집이나 회사가 아닌 곳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며, 나는 매년 이러한 사색과 공상의 시간이 너무 기대된다. 매년 새로운 해가 뜬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생각을 할 때가 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나에게 줘야 하는 것이다.
리더들이여, 그리고 리더가 되고 싶은 자들이여, 멀리멀리 휴가를 떠나라. 그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그 상상과 경험을 가지고 돌아오라. 그동안 우리의 사랑스런 조직들은 무럭무럭 어른이 되어있을 것이다. 우리의 너무 귀여운 자녀들도 함께.
정리=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