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리노이대 합성생물학연구실인 아이바이오팹은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기 위한 인류의 ‘무기고’ 중 한 곳이다. 반도체팹(실리콘웨이퍼 제조공장)처럼 외부 먼지, 소음 등으로부터 차단된 아이바이오팹에 들어서면 팔이 자유자재로 꺾이는 관절로봇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5m 길이의 트랙을 타고 각종 장비를 오가며 유전자 증폭·분석·개량에 필요한 테이터를 수집한다. 서상우 서울대 교수는 “실험 장비에서 쏟아지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인공지능(AI)이 머신러닝(기계학습)으로 분석하는 바이오 연구개발(R&D)의 기초 인프라”라며 “모더나가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을 발 빠르게 개발하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 게 바이오파운드리”라고 말했다. 미국은 10여 년 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바이오파운드리를 도입했지만, 한국은 지난해 9월에야 도입을 위한 예비타당성조사를 시작했다. 110조원 시장으로 커지는 ‘미생물 신약’
마이크로바이옴은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미국조차 아직 미생물을 활용한 신약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미국 록펠러대 연구진은 지난해 11월 “미생물의 대사산물이 코로나19 감염을 억제할 수 있다”는 연구 논문을 내놨다. 미생물과 신체의 상호작용이 소화불량, 비만, 당뇨, 암은 물론 자폐증, 우울증, 알츠하이머 등과도 연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쏟아지면서 강대국들은 무주공산인 마이크로바이옴 시장을 놓고 치열한 R&D 전쟁을 벌이고 있다. 컨설팅업체 프로스트&설리번에 따르면 세계 마이크로바이옴 시장 규모는 2019년 811억달러에서 2023년 1087억달러로 커질 전망이다.
바이오는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반도체, 2차전지(배터리)와 함께 공급망을 글로벌에서 블록(역내)으로 재편하겠다고 공언한 대표 산업이다. 신약 물질을 개발하는 설계(바이오팹)부터 균주를 배양해 대량으로 생산하는 제조 시설(바이오팹리스)을 모두 석권하겠다는 의지다.
‘바이오이코노미’를 만들기 위해 미 에너지부는 2016년 에자일바이오파운드리라는 컨소시엄을 설립했다. 6개 국립연구소와 버클리랩 등 대학 및 민간기업이 연합해 바이오 기반의 신물질을 개발 중이다. 민·관·학 컨소시엄의 목표는 바이오파운드리를 기반으로 개발부터 생산까지 바이오산업의 주기를 기존 10년 이상에서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통해 신개념 연료 및 물질 개발로 이어져 탈(脫)탄소 시대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동일한 기술이 마이크로바이옴 등 새로운 바이오 R&D에 활용될 수 있다. 미국은 민·관·학 연합체로 ‘속도전’
미생물 연구자 출신 최고경영자(CEO)인 강지희 에이투젠 대표는 “국내 마이크로바이옴기업의 역량은 미국에 비해 부족할 게 없다”면서도 “모호한 법·규정이 많아 시도조차 못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마이크로바이옴 임상만 해도 해외에서 1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다. 국내에서도 규제만 풀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임상조차 비용과 시간을 두세 배 더 들여가며 해외에서 해야 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
장내 미생물을 개량해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방식이 미국과 달리 규제에 막혀 있는 터라 국내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는 자연에서 발견한 미생물을 모아 어떤 질병에 효능이 있는지를 대조해보는 것만 가능하다.
서 교수는 “치료 효능 측면에서도 미국 방식이 훨씬 우세하다”며 “국내 방식은 안전성 면에선 강점이 될 수 있으나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같은 과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서 교수는 “마이크로바이옴 치료제 분야를 미국이 주도하고 있지만 기술 수준만 놓고 보면 한국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며 “인프라 투자와 규제 환경만 뒷받침되면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미생물(microbe)과 생태계(biome)의 합성어. 인체에 사는 미생물과 유전자 정보를 뜻한다. 몸무게 70㎏ 성인을 기준으로 약 38조 개의 마이크로바이옴이 체내에 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