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트업체 A사는 다음달 27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대비해 지난 7월부터 산업안전기사 모집 공고를 냈지만 12월 29일 현재까지 6개월간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 일반 직원보다 40% 이상 연봉을 높게 제시해도 소용없었다. A사 대표는 “산업안전 전문인력이 사고 위험이 높은 건설업, 중소기업으로 오려 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경남 창원 기계제조업체 B사는 최근 한 대형 로펌에 중대재해법 컨설팅을 급하게 의뢰했지만 거절당했다. 대기업의 중대재해법 컨설팅 의뢰가 먼저 몰려든 탓이다.
중대재해법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중소기업은 준비 단계부터 전문인력 부족, 비용 증가 등의 고충에 시달리고 있다. 내년 1월 27일 법이 시행되면 대다수 중소기업이 사실상 법을 준수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릴 것이란 우려를 낳고 있다. 연봉 40% 높여도…안전 인력 이탈
중대재해법 시행 대상인 근로자 50인 이상 기업은 국내 3만여 개로, 이 가운데 90%인 2만7000여 개가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발표한 ‘중대재해법 준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소제조업체의 53.7%가 “시행일에 맞춰 법적 의무사항 준수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의무이해의 어려움’(40.2%)과 ‘전담 인력 부족’(35.0%), ‘준비기간 부족’(13.9%)과 ‘예산부족’(11.0%) 등의 사유(복수응답)였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코로나19 장기화, 원자재 가격 급등,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등으로 중소기업 상당수가 체력이 바닥나 안전 관련 투자 여력도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중대재해법 시행령에 따르면 50인 이상 기업은 무조건 산업안전 관련 전문 인력(안전관리자)을 갖춰야 하고,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외부 전문기관에 관련 업무를 위탁해야 한다. 이를 위반한 상태에서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의 징역과 10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
안전관리자란 산업안전기사 건설안전기사 등 자격을 갖추거나 일정 교육 및 경력 기준을 갖춘 사람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현재 기업이 자체적으로 선임한 안전관리자는 2만8994명이다. 또 매년 산업 건설 가스 소방 등 분야에서 2만 명의 안전관련 자격증 소지자가 배출된다.
50인 이상 기업이 3만여 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급이 충분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사고에 따른 위험부담 때문에 인력 수요가 큰 건설사나 중소기업으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컨설팅 비용도 기존 수천만원대에서 수억원대로 치솟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중소기업도 상당수다. 대기업들이 웃돈을 주고 인력을 대거 흡수한 것 역시 중소 건설사와 중소기업의 안전인력이 부족해진 배경이다. 한 건설업체 대표는 “중소 건설사에선 안전관리자에게 중소기업 평균 연봉(3000만~4000만원대)보다 2000만원 높은 5000만~6000만원대 연봉을 주는데도 대기업이 8000만~9000만원대를 제시해 다 빼앗긴다”고 하소연했다. 안전업무 대신 서류작업만 수백 장중대재해법상 사고 한 번으로 사업주가 감옥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일부 기업은 현장보다 서류 작업에 치중하는 등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수도권 한 뿌리기업은 최근 생산직 근무자를 중대재해 대응 인력으로 발령내면서 오히려 사고 위험이 커졌다고 호소한다. 중대재해법 시행령을 지키려면 안전관리 계획 수립부터 평가 및 개선 작업까지 방대한 서류 작업이 필요한데, 채용 여력이 없어 현장 인력을 빼다 보니 위험한 작업을 거들 인력이 부족해진 것이다. 이 기업 대표는 “중대재해 발생 시 사업주가 구속되느냐, 마느냐가 법상 만들어야 할 서류로 판가름나다 보니 정작 현장 안전엔 소홀해지고 서류작업만 수백 장으로 늘어났다”고 하소연했다.
충북지역 한 금속업체는 작업자가 안전모를 쓰지 않거나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안전 수칙을 위반하면 곧바로 감봉 등 징계를 내리기로 사내 규정을 바꿨다. 이 기업 사장은 “예전엔 그냥 경고만 하고 넘어가던 일도 이젠 내가 구속될 수 있기 때문에 봐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양옥석 중기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중소기업은 원하청 구조와 열악한 자금 사정, 오너의 99%가 대표이사라는 점에서 중대재해법 시행의 충격이 크다”며 “고의·중과실이 없는 경우 면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입법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안대규/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