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철 前 KAIST 총장 "실패 용납 않는 정부지원이 과학 걸림돌"

입력 2021-12-27 18:16
수정 2021-12-28 01:21
“비행기가 양력을 잃고 떨어지는 상태를 ‘스톨 포인트(stall point)’라고 합니다. 한국 과학이 지금 이 스톨 포인트 직전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동안의 방식으론 불가능합니다. 정치는 물론 과학 관련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신성철 전 KAIST 총장(사진)을 표현하는 몇 가지 단어가 있다. 나노 자성체 스핀 동력학을 연구하는 학문인 ‘나노스핀닉스’를 개척한 물리학자, ‘최초의 KAIST 동문 총장’ 등도 있지만, 특히 대중에겐 무리한 감사에 휘말린 ‘다사다난했던 총장’으로 기억되곤 한다.

4년의 임기를 마치고 올초 퇴임한 신 전 총장이 최근 과학기술 정책 제언서인 《대한민국 과학기술 미래전략》을 펴냈다. 과학기술 혁신을 위해 정책 변화는 물론 ‘정치의 변화’도 함께 해달라는 목소리를 담았다. 27일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신 전 총장은 “선진국을 따라잡기만 하는 과학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패러다임 변화를 이뤄야만 진정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미래전략》은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도전적 연구과제 지원, 과학기술계와 의료계 협업, 과학기술 거버넌스 선진화 등 10개 의제를 제시하고 있다. 신 전 총장은 이 중에서도 도전적 연구과제를 위한 ‘실패 용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정부 지원 연구들이 혁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 전 총장은 “연구개발 과제는 10개 중 1~2개만 성공해도 다행인데 그동안 정부 연구비로 이뤄지는 연구들은 정부 감사를 통과해야 하니 ‘성공하는 과제’를 진행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며 “몇 번 스트라이크를 내더라도 홈런을 칠 수 있는 ‘거포’ 과학자를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전 총장 역시 ‘감사의 덫’에 걸리기도 했다. 2018년 그는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재직 시절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에 주지 않아도 될 연구비를 지급했다는 의혹을 받아 정부에 의해 고발됐다. 그러나 LBNL이 계약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국내외 과학계도 비판에 나서면서 검찰의 불기소로 마무리됐다. 불기소로 끝났지만 신 전 총장에게 남은 후유증은 컸다.

“세계적 연구소와 국제공동연구를 하면서 거대 시설을 활용하는 데 당연히 지급할 비용이었지만 이걸 정치권에서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소송에 휘말리면서 경제적·심적으로도 타격이 컸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과학계의 거버넌스 체계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처럼 ‘앞서가는 연구’를 위해서는 정치와 과학이 ‘동행’하는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신 전 총장의 지론이다. 과학정책이 정치적 결정에 휘둘리면 비효율·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규모 과학 프로젝트가 정치인에게 ‘표심’ 수단이 돼 제대로 된 검토 없이 밀어붙이는 일이 여전히 발생한다”며 “‘기술패권’의 시대가 열린 만큼 과학자들이 정치에 참여하진 않더라도 정치권에 기탄없이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