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진료하는 의사들 '교수창업' 주도한다

입력 2021-12-26 17:31
수정 2021-12-27 01:45
대학병원 교수 창업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연구 교수 중심에서 실제 환자를 보는 임상 교수로 창업 주체가 변하고 있다. 분야도 최고난도로 꼽히는 항암 신약 개발로 확장되고 있다. 딥러닝 같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려는 시도도 늘고 있다. 의료계 안팎에서는 “의료적 미충족 수요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의 창업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신약 개발 도전하는 교수들26일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올해 10개 안팎의 바이오벤처가 연구중심병원에서 설립됐다. 작년 18개보다는 적지만 5년 전부터 해마다 10개 넘는 바이오벤처가 대학병원에서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연구중심병원발(發) 바이오벤처는 2014년만 해도 3개에 불과했다. 2013년에는 1개였다. 대학병원 교수가 벤처를 창업하면 ‘별종’으로 취급받던 때다. 그러더니 2016년 16개, 2017년에는 19개로 늘었다.

대학병원에 바이오벤처 창업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5년여 전이다. 최근 1~2년 새에는 창업 트렌드가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환자를 직접 보는 임상 교수의 신약 개발 도전이 늘고 있는 점이다. 나권중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와 최홍윤 핵의학과 교수가 지난 7월 공동 창업한 포트래이가 대표적이다. 나 교수와 최 교수 모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30대 후반의 새내기 교수로, 서울대병원 암병원에서 환자를 직접 진료한다. 이들은 폐암을 진단할 수 있는 유전체 분석법을 찾다가 공간 전사체를 돌파구로 지목했고 창업으로 연결시켰다. 포트래이는 이 기술을 활용해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최 교수는 “책상에 앉아 논문만 쓰기보다 환자에게 실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산업화하는 것이 환자를 실질적으로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사항암제 개발 바이오벤처 셀러스를 지난해 창업한 조선욱 서울대병원 내과 교수도 비슷한 케이스다. 대사항암제는 몸속 대사를 조절해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차세대 항암제다. 대사 기능을 조절하는 내분비 기관인 갑상샘 전문가인 조 교수의 전문 분야다. 조 교수도 환자를 직접 본다.

서울아산병원이 올해 배출한 바이오벤처 네 곳 중 두 곳도 신약 개발 벤처다. 이상욱 방사선종양학과 교수가 창업한 PR바이오테크는 체내 방사선 노출량을 측정하는 진단키트와 항체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같은 병원의 장세진 병리과 교수는 온코클루를 세워 환자별 맞춤 약물을 선별할 수 있는 체외진단기기와 항암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초대 신약개발센터장을 지낸 진동훈 웰마커바이오 대표는 “환자와 접점이 많은 진료과로 창업 주체가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며 “이들은 환자 치료의 최전선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신약이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의료 영상기기→AI 활용 플랫폼 변화신약 개발과 함께 각종 플랫폼 개발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딥러닝 등 AI 기반 기술도 활발하게 활용된다. 과거 의료기기나 영상장비 개발 중심이던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세브란스병원이 올해 배출한 에이치바이오(하윤 신경외과 교수)와 애이마(손주혁 종양내과 교수)는 각각 암 조기진단 플랫폼과 신약 개발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주형준 고려대 안암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올해 의료 데이터 통계 제공 플랫폼 업체 틸더를 창업했다. 김성훈 서울아산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는 시그널하우스를 창업해 딥러닝 기술을 활용한 심폐음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같은 병원 김경원 영상의학과 교수도 클라우드 기반의 임상 데이터 관리 플랫폼 개발업체 트라이얼인포매틱스를 설립했다.

대학병원 교수의 바이오벤처 창업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유전체 분석 바이오벤처 지니너스를 창업해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삼성서울병원 유전체연구소장 출신인 박웅양 대표는 “교수들이 가지고 있는 의학적 지식을 성공적으로 사업화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했다.

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