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몇 년 전 ‘규제개혁 모든 정부가 실패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다시 쓰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하나 더 추가해서 규제개혁은 청년과 기득권의 힘겨루기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상상과 창의는 개인 소양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량이다. 복잡한 프로그래밍과 컴퓨팅파워는 무료이거나 매우 쉽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차별성은 상상과 창의에서만 가능하다. 정부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개인의 실력이 분출한 분야가 음악과 방송콘텐츠인데, 그 경위를 한번 살펴보자.
그 옛날 음악은 수입규제가 사실상 없는 유일무이한 문화 분야였다. 필자 기억에 대부분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팝송만 틀었다. 그 힘든 상황에서 우리 뮤지션들이 처절하게 배우고 익혀 자기역량을 배양한 뒤 이제 세계 대중음악 시장을 쥐락펴락한다.
영화는 반대로 철저한 수입규제를 향유했으나 결과적으로 지독한 침체를 겪었다. 소정의 성과는 있다. 그러나 진짜 실력은 결국 산업에서 드러난다고 본다면, 영화산업의 현실은 불투명하다. 방송콘텐츠에서는 대박이 났다. 넷플릭스에 띄운 ‘킹덤’ ‘D.P.’ ‘오징어 게임’ ‘지옥’은 모두 우리 청년들의 정서를 품고 있다. 팍팍한 현실의 부정, 기득권이 팽배한 사회에 대한 냉소와 비판, 얇고 희미한 희망이다. 이것이 글로벌 공감을 얻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빈 화면에 청년들이 마음껏 드로잉하면 성공할 것이다.
인공지능(AI), 생명바이오, 모빌리티 등의 첨단 분야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사회의 불안함에 기득권이 편승해 어둡고 음침한 규제로 청년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교통사고로 매일 3600여 명이 사망한다. 수백 년 전 자동차 발명가와 당시 규제 결정자가 지금의 현실을 보고 자동차를 포기했다면 인류문명 차원에서 옳은 판단인가?
이렇게 우리의 문제를 다른 요소로 귀인하려는 움직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정부조직을 개편하자는 주장이다. 이렇게 저렇게 떼어내고 붙이면 뭐가 확 바뀔 듯 포장도 한다. 문제의 본질을 숨기려는 음모다. 정부조직이 개편되면 그 이슈에 파묻혀 몇 년을 허송할 것이다. 공무원은 그대로 있고, 일하는 패턴도 변하지 않는다. 재정 투입을 늘리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기획 능력은 바닥을 치고 있다. 실력이 안 된다. 시장에서는 수천 명의 실력자가 수천 개의 수단을 필사적으로 궁리한다. 고정된 월급을 받는 정년보장 사무관들이 가까운 업자 몇 명이 들고 온 두세 개의 대안을 검토해서 무슨 제대로 된 기획이 나오겠는가?
좋은 사업이 있는데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소리가 들린다. 어처구니없는 스토리다. 제대로 된 예타를 하지도 않은 정부에서 부끄러운 제도다. 비용 대비 편익이 30%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살림살이를 거덜내고 있다는 의미다. 재정당국이 검토하고 있다는 대상 범위 축소나 면제는 근본적으로 시대착오적이며 무책임한 짓이다.
규제개혁에 대한 반동세력은 강고하고 교묘하다. 청년의 기회를 막아버리는 힘이다. 온라인 플랫폼 산업을 예로 보자. 미국은 빅4의 독점적 행태 등을 집중적이고 정교하게 교화하는 강력한 규제를 집행 내지는 검토하고 있다. 반면 우리 국회에서는 엉뚱하게도 100여 개 기업을 묶어 국가 재량으로 느슨하게 다루고 혼내는 스타일의 규제 패키지를 검토하고 있다. 기업으로 성공하면 정부 규제의 융단폭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기업을 하려 하겠는가?
청년들이 마음껏 창의와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 장을 여는 죽창은 어른들이 들어야 한다. 그 반대로 우기는 나쁜 어른이 많다. 그린벨트를 어떻게 선용해야 하는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가? 대학입시를 미래사회와 어떻게 튜닝해야 하는가? 온 나라가 고민하고 토론해야 한다. 전면적으로 기회를 열어야 지금의 희생이 또 다른 미래의 기회로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이 규제개혁의 사고방식이다. 노인도 청년이 돼서 우리 사회가 청년사회로 거듭거듭 재생돼야 한다. 인간의 신체는 본능적으로 이미 그리하고 있다. 정신과 판단도 그리 못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