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인류 역사 첫 페이지에 쓰인 '에덴 쟁탈전'

입력 2021-12-23 18:06
수정 2021-12-24 02:14

최초에 전쟁이 있었다. 에덴을 차지하기 위한…. 처음으로 문자를 발명했던 이들은 치열했던 ‘에덴 쟁탈전’을 인류의 첫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점토판에 빼곡하게 적혔던 최초의 역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새까맣게 잊혔다. 1877년 프랑스인 에르네스트 드 사르제크가 BC 2600~2334년에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쉬와 움마 사이에 벌어졌던 격전을 담은 문자 사료를 발굴하기 전까진 말이다.

《최초의 역사 수메르》는 30여 년간 수메르인들이 남긴 설형문자 자료를 파고든 국내 연구자가 인류 최초 제국의 역사를 재구성한 책이다. 영국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각지에 소장된 점토판과 비문이 전하는 최초 역사가들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한다.

문자로 적힌, 기록의 역사는 메마른 토판과 거친 석비 표면에 갇힌 과거의 사실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그는 구에덴나(에덴으로 가는 길목)를, 닌기르수께서 사랑하는 들판을 착취할 만한 자로다. 그자를 물리치자”(루브르박물관 소장 ‘독수리 석비’ 명문 109~113행)는 4400년 전에 적힌 문구는 현대인의 피마저 끓게 한다.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으로 낯익은 에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5200년 전부터 수메르의 행정 문서에 나온다. 문자가 발명되자 에덴이란 명칭은 곧바로 점토판에 새겨졌다. 수메르 멸망 1400년 후에 작성된 히브리 성서의 기록과 달리 ‘오리지널 에덴’에는 인간과 동물이 대화하는 동산도, 뱀의 유혹도, 선악과도 없었다. 수메르의 에덴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는, 수많은 물길로 연결된 농사짓기에 적합한 금싸라기 같은 땅이었을 뿐이다.

수메르 도시국가의 왕들은 저마다 에덴을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 됐다. 에덴으로 가는 길목에선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비옥토를 차지하는 것은 도시의 풍요를 보장하는 지름길이었다. 에덴은 결코 양보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에덴 전쟁은 물 전쟁이었고 식량 전쟁이었으며 영토 전쟁이었다.

하지만 치열하고 장구했던 에덴 전쟁의 역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로 망각됐다. 그리고 근대 역사학의 메스가 수메르 유적에 가해지고, 수메르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가 늘어난 오늘날조차 낯선 존재로 남았다. 수메르 연구의 기준 역할을 했던 ‘수메르 왕명록’에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던 영향이 컸다.

‘수메르 왕명록’은 왜 에덴 전쟁에 침묵했던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에덴 쟁탈전의 승자였던 도시국가 움마를 악카드인 사르곤이 멸망시키면서 ‘망각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후 악카드인의 왕조마저 위기에 처하자 ‘수메르 왕명록’의 저자 누루-닌슈부르가 조국의 정체성, 정당성, 정통성을 찾기 위해 역사 왜곡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조국 이씬을 정통 수메르 왕조라고 주장하면서 에덴 쟁탈전 당사자였던 라가쉬와 움마의 기록을 지웠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덮는다고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땅속에 묻혔던 수많은 사료를 모두 없앨 수는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의 삶에 새겨진 흔적을 모두 지울 수도 없었다. 수메르의 화폐단위 쉐켈이 현재 이스라엘의 화폐 단위로 여전히 쓰일 정도로 생명력이 질긴 것이 이를 방증한다.

각지에 산재하는 각종 사료가 증언하는 수메르의 역사는 최초의 역사였다. 최초의 제국, 최초의 법전이 수메르에서 나왔다. 최초의 물가 폭등도, 최초의 고리대도 이때 등장했다. 당시 보리 종자를 빌려주고 받은 이자는 원금의 40배에 달했다. 최초의 부정부패조차 “먼 옛날부터 씨앗이 생겨날 적부터 있었다”는 표현(루브르박물관 소장 AO03278서판)으로 자취를 남겼다.

최초의 사회개혁도 이때 시행됐다. 황제 엔메테나는 가난한 백성의 보리 빚을 탕감했다. “어머니를 자식에게 돌려보냈고, 자식을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루브르박물관 소장 AO 24414 서판)고 당대의 필경사는 성군을 찬미했다. 여기서 어머니를 뜻하는 ‘아마’와 돌아가다라는 뜻의 ‘기’가 합쳐진 설형문자 ‘아마-기’는 ‘자유’를 의미한다. 최초의 자유도 수메르의 토양에서 싹을 틔웠다.

저자는 최초의 역사 왜곡이 오랜 기간 사람들의 눈을 가렸다고 주장한다. 초기 역사책이 역사를 고치고, 비틀고, 감추는 과정에서 드러낸 것은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그런 인간의 치부조차 감추지 않고 오롯이 담아왔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