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바다를 향해서…멈추지 않는 1분1초

입력 2021-12-23 16:59
수정 2021-12-24 02:43

손목시계의 범주를 나눌 때 ‘다이버 워치’를 빼놓을 수 없다. 정장이든 캐주얼이든 어떤 옷과도 어울린다는 장점 때문에 시계업계의 스테디셀러로 손꼽힌다. 21세기에 다이버 워치를 차고 실제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싶지만 내로라하는 시계 회사 가운데 다이버 워치를 만들지 않는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해군 장교와 다이버가 의기투합해 만들어다이버 워치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항목이 있다. 잠수부가 물속으로 수십미터 내려가도 고장나지 않고 작동할 수 있는 방수 성능은 필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수중에서 시계를 확인할 수 있도록 글자와 눈금이 큼직한 것은 물론 야광 성능도 충분해야 한다. 잠수 시간을 측정할 때 사용할 용도의 한쪽 방향으로만 회전하는 베젤은 다이버 워치를 상징한다. 수많은 시계 업체가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다이버 워치를 내놓고 있지만 대부분 이 같은 요소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다.

다이버 워치의 ‘전범’을 제시한 것은 스위스의 시계 회사 블랑팡이다. 1753년 설립된 가장 오래된 시계 회사다. 블랑팡이 1953년 내놓은 ‘피프티 패덤즈’는 앞서 언급한 다이버 워치의 전형을 모두 갖추고 있다. 블랑팡이 이 시계를 만들게 된 계기는 지극히 실용적인 이유에서였다. 2차대전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았던 당시 프랑스 해군은 잠수임무에 사용할 시계가 필요했다. 로베르 말루비에르 대령과 클로드 리파우드 대위는 방수능력과 내구성이 우수하고 깊은 바닷속에서도 눈금을 읽을 수 있는 시계를 찾고 있었다. 당시 시중에서 판매되는 시계들을 모두 시험해봤지만 조건을 만족하는 시계를 찾지 못했다. 이들은 블랑팡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장자크 피슈테르(사진)를 찾아가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피슈테르는 다이버 애호가였다. 최고의 수중시계를 위해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당시 시계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하나씩 해결해갔다. 크라운(용두)을 이중 밀폐처리하는 방법을 고안했고, 잠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베젤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잠금 장치를 개발했다. 수중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시계를 더 크게 만들고 바늘과 숫자는 야광 처리했다. 수동으로 태엽을 돌려 감지 않고 로터를 활용해 자동으로 시계가 움직이는 오토매틱 방식을 채택한 것도 포인트였다. 크라운을 돌려 태엽을 감는 수동 방식의 특성상 밀폐장치가 마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계가 바로 피프티 패덤즈다. 시계 이름은 단어 그대로 ‘50패덤’이란 의미다. 1패덤이 6피트(약 1.83m)를 가리키는 단위다. 50패덤은 91.5m다. 당시 다이버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수심으로 여겨졌다. ‘쿼츠 파동’으로 무너졌지만 고급화로 부활피프티 패덤즈는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 독일, 체코 등의 군대에서 활용됐다. 혁신적인 기능과 완성도가 인정받은 셈이다. 1956년 발표된 세계 최초의 해양 다큐멘터리 ‘침묵의 세계’에선 전설적 다이버 자크 이브 쿠스토가 피프티 패덤즈를 차고 걸프해를 탐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블랑팡이 피프티 패덤즈를 내놓은 이듬해인 1954년, 롤렉스도 서브마리너로 첫선을 보이며 ‘다이버 워치 대전’에 뛰어들었다. 다이버 워치의 편의 기능 덕분에 이 시계를 찾는 사람이 늘었고, 수많은 업체가 다이버 워치를 내놓기에 이른다.

다른 모든 시계 회사처럼 블랑팡도 1970년대 ‘쿼츠 파동’을 피할 수 없었다. 시간을 알기 위해 더 이상 비싼 돈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다. 저렴한 쿼츠 시계가 세계를 뒤덮으면서 스위스의 시계제조 업체가 잇따라 무너졌다. 블랑팡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회사가 선택한 해결책은 고급화였다. 과거 실용적인 시계보다 기술력을 과시할 수 있는 시계들로 차별화에 나선 것. 1992년 세계 최대 시계 회사인 스와치그룹에 인수됐다. 그룹 내에서 브레게를 잇는 고급 시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피프티 패덤즈 역시 이 회사를 상징하는 제품으로 여전히 출시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시계업계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스마트워치의 부상이었다. 지난해 기준 애플의 애플워치 출하량은 3070만 개로, 스위스 전체 시계 출하량(2100만 개)을 한참 넘는다. 그럼에도 쿼츠 파동과 같은 분위기는 찾기 어렵다. 시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백 년 전통과 역사, 기술력을 손목에 올려놓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