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가 한국에서는 흔한 말이지만 미국 등지에서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이 보편적이다. 중남미를 하나로 다 묶기에는 무리도 된다. 멕시코부터 칠레·아르헨티나까지 면적이 광대한 데다, 국가별 편차도 다양한 까닭이다. 공통점도 분명히 있다. 식민 역사 외에 문화·언어·종교 등으로 동질성이 강하다.
이 지역이 벨트로 묶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 유사성이다. 사회주의 정권이 이어졌을 때 나온 ‘좌파 벨트’처럼 ‘핑크 타이드(pink tide)’라는 말도 이 지역 국가의 연쇄적 좌경화에서 나왔다. 1999년 차베스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 등 남미 12개국 중 10곳에서 좌파가 파도 타듯 잇달아 집권하면서 뉴욕타임스가 쓴 용어다. 공산주의의 ‘붉은(red) 물결’과 비교할 때 연성 좌파라며 분홍이라는 것이다.
핑크 타이드는 2015년 아르헨티나에서 우파 집권으로 급속히 쇠퇴했다. 2017년 말 칠레에서도 피녜라가 당선되면서 우파 정권이 7개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번에 칠레에서 좌파 35세 가브리엘 보리치가 집권하면서 핑크 타이드가 되살아난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멕시코·아르헨티나에서 좌파가 집권한 것까지 감안하면 ‘핑크 타이드 부활’ 혹은 ‘2차 분홍 조류’라 할 만하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브라질과 콜롬비아까지 정권이 바뀌면 핑크 타이드의 재석권이 된다.
코로나 와중의 좌경화 기류도 연구감이다. 최근 독일에서 중도좌파 연정이 구성됐고, 미국에서도 올해 민주당이 집권했다. 팬데믹 충격으로 중산층이 흔들리면서 달콤한 복지 구호가 먹힌다는 분석이 나올 만하다. 고립주의 경향 속에 중국이 ‘제3 세계’를 파고들면서 핑크 타이드를 살려냈다는 평도 있다.
“칠레를 신자유주의 무덤으로 만들겠다”는 최연소 칠레 대통령 당선자의 행보가 주목된다. 환경보호를 내세우며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의 광산사업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은 국제원자재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중남미가 그렇듯이, 칠레도 사회과학 연구의 보고라 할 만큼 다채로운 정치판이 펼쳐졌다. 장기 집권한 피노체트 군부정권은 신자유주의로 남미 부국이 됐지만 빈부격차 문제를 남겼다. 그의 전임 캐비어 좌파 아옌데 때는 국유화 등으로 ‘자본가 파업’ 현상을 유발해냈다. 보리치는 어떨까. 극빈의 베네수엘라 길로 갈까. 시대변화에 부합하는 유럽의 ‘스마트 좌파’를 따를까.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