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위를 이끌던 좌파 성향의 30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35)가 칠레 대통령에 당선됐다. 칠레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에 이어 칠레에서도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중남미에서 ‘핑크 타이드’(좌파 물결)의 부활이 한층 뚜렷해지는 모습이다.
19일(현지시간) 치러진 칠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좌파연합 ‘존엄성을 지지한다’ 소속 후보인 보리치는 55.9%를 득표하며 당선을 확정지었다. 경쟁자인 극우 성향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후보의 득표율(44.1%)보다 11%포인트 이상 앞섰다. 1990년 칠레 민주화 이후 중도좌파가 집권한 적은 있지만 공산당까지 아우르는 좌파의 대선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보리치는 중도우파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현 대통령의 뒤를 이어 내년 3월 취임한다.
보리치는 유럽 크로아티아 이민자의 후손으로 태어나 남부 소도시 푼타아레나스에서 자랐다. 칠레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2011년 대학 등록금 철폐를 비롯한 교육개혁을 요구한 학생시위를 주도하며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2013년엔 27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출마할 수 있는 최저 나이 조건을 충족한 올해 바로 대선에 도전해 승리했다.
칠레의 불평등 문제가 보리치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평가가 많다.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정권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을 채택했다. 그 결과 칠레는 라틴아메리카의 부국 중 한 곳이 됐지만 빈부격차도 커졌다.
피노체트 정권이 무너진 1990년 이후 집권한 중도정권 아래서도 인플레이션과 공공서비스 부족 문제가 불거졌다. 불평등에 대한 칠레 국민의 불만은 2019년 시위로 터져나왔다. 수도 산티아고의 지하철 요금 인상을 계기로 빈부격차 항의 시위가 수개월 동안 이어졌고 수십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를 계기로 도시에 사는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국민 상당수가 좌파 지지 세력으로 돌아서며 보리치를 중심으로 한 정권 교체의 동력이 됐다는 분석이다.
보리치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증세 및 공공 지출 확대, 연금·의료·교육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여성과 원주민, 성적소수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정책도 내세웠다. 그는 “과거에 칠레가 신자유주의의 요람이었다면 앞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보리치가 환경보호를 위해 광산사업 등에 반대한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원자재 시장에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칠레는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좌파가 정권을 잡은 현상을 일컫는 ‘핑크 타이드’가 되살아났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 중 우파가 정권을 잡고 있는 곳은 브라질과 콜롬비아 정도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