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서 뒤집힌 현대重 통상임금 소송…"'신의칙' 적용 어려워졌다"

입력 2021-12-16 15:38
수정 2021-12-16 17:04


현대중공업이 지난 16일 대법원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한 가운데, 핵심 쟁점이었던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엄격한 판단기준을 제시했다. 경영계에선 "사실상 신의칙 적용이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법원은 2013년 전원합의체에서 "정기·일률·고정성 있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이라는 판결을 내놓았다. 통상임금을 기본으로 계산하는 각종 수당 등을 다시 계산하고 부족분을 소급해서 추가로 지급하라는 의미다.

다만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초래되거나 회사 존립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추가 임금 지급 않아도 된다"는 단서도 함께 제시했다. 이 단서가 바로 신의칙이다. 원래는 상대방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민법상 원칙을 통상임금 소송에 끌어온 개념이다. 신의칙을 적용할 경우 기업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해도 추가 임금 지급을 면제 받게 된다.

이후 통상임금 소송이 우후죽순 제기됐지만 신의칙이 언제 적용되는지를 두고 법리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하급심에서는 같은 사건 1, 2심에서 조차 신의칙 적용을 두고 결론이 엇갈리는 상황이 적지 않았다. 이번 현대중공업 사건 역시 1심은 신의칙 적용을 부정했지만 2심은 적용해 회사측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대법원은 2019년 신의칙 적용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던 '시영운수 통상임금 사건'에서 사실상 도산 위기가 아니면 신의칙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신의칙을 최대한 엄격 적용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한 대법원은 이후 회생절차 중이던 한진중공업 사건 등에서도 신의칙 적용을 부정했다. 이에 법조계에서는 "신의칙 적용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 6월 코로나19로 위기를 맞은 아시아나항공 통상임금 사건에서 대법원이 신의칙을 적용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같은 날 선고된 두산중공업 사건에서는 적용을 부정했지만, 대법원은 이후 지난해 7월 한국GM, 쌍용차에서 제기된 통상임금 소송에서 각각 "공적자금 8100억원을 지급 받는 상황", "장기간 큰폭 적자로 회사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신의칙을 적용했다.

이후 대법원은 지난 6월 한국GM에서 제기된 다른 통상임금 소송에서 "워크아웃을 겪었지만 그 기간동안 부채비율이 낮아졌고 경영사정도 좋아졌다"며 신의칙 적용을 부정해 "판결 기준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신의칙의 명확한 판단기준은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사건에서 제시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보면 대법원이 사실상 앞으로 신의칙 적용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대법원은 신의칙 적용을 배제한 이유에서 "사용자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경영 예측을 했다면 경영상태의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며 "향후 경영상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엔 신의칙을 들어 근로자의 청구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김희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영자가 경영상태나 악화 가능성을 예견하고 극복가능성을 진단한다는게 현실에서 가능한가"라며 "사실상 2013년 전원합의체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뒀던 신의칙 적용을 폐지하겠다는 취지"라고 지적했다.

또 재판부는 "한진중공업의 경영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2014년은 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한 2012부터 1년 이상 지난 다음"이라고도 지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경영상 어려움의 판단 시점이 소 제기시인지 사실심 변롱 종결시인지도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 노동경제학자는 "경제지표는 항목이나 기간 설정에 따라 완전히 다른 통계나 결과가 나온다"며 "법원이 법적 판단이 아닌 경영·재무적 판단까지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곽용희/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