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예스맨’이 스타트업으로 옮긴 까닭은 [찐 팀장의 굿 초이스]

입력 2021-12-16 09:48
수정 2021-12-16 10:20
[한경잡앤조이=진태인 집토스 전략교육팀장]

“아깝게 왜 그만 두노?”

아버지의 깊은 탄식과 함께 한 문장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보다 나은 아이디어는 없었다. 문득 첫 차를 살 때의 기억이 겹쳤다. ‘미니쿠퍼 오픈카를 타면 작으니까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무난한 걸 사야해.’ 온 사방에서 안정을 이야기했다. 그 때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러다 돈만 벌다 죽는 기계가 될 것 같다..”

새벽 5시 55분, 어두운 집 밖을 나선다. 오전 7시 30분, 출근 도장을 찍고 컴퓨터를 켠다. 출근 도장이 퇴근 도장으로 바뀔 때까지 나는 예스맨으로 바뀐다. 선배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가 선배 눈높이에 맞춘다. 저녁 8시, 저녁식사 시간이다. 배를 채우고 야근을 시작하면 어느덧 대중교통이 멈추는 시간이 된다. 11시 이후 퇴근 도장을 찍으면 택시비가 지원된다. 팀 영수증을 처리하다가 ‘이번 달도 내가 택시 제일 많이 탔구나’를 깨닫는다. 올림픽대로를 쏜살같이 달리는 택시 안에서 뻑뻑한 눈으로 한강을 바라본다. 한강의 야경은 루브르 박물관의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초중고를 모두 어촌마을에서 다녔다. 지하철보다는 선착장의 배가 친숙했다. 지리 선생님의 꿈을 안고 지리교육과에 진학했다. 지리는 너무 재미있었지만 평생 같은 것을 가르치는 것도 답답했고, 대드는 학생을 사랑으로 감싸 줄 넓은 가슴도 없었다. 재미있던 지리학을 깊게 공부하다 보니 지질학, 나아가 지구과학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혼자 도서관을 전세 내다시피 지구과학 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수 년간 눈물의 시간을 보낸 후 S대에 학사편입을 하게 된다.

과학자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박사급은 되어야 연구원에 갈 수 있었다. 그만큼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돈을 벌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 돈이 없으니 유통 회사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입사 스펙을 쌓느라 관악산에서 막걸리를 팔기도 하고, 남의 학교 졸업식에 가서 촬영 기사도 했다. 특이해서 합격했으리라. 신입은 화물차 리프트에 발가락이 깔리기도 했고, 영하 30도 창고에서 박스 나르는 게 일상이었다. 뭐 하려고 대학까지 다녔나 생각도 들었다. 벗어나겠다는 생각으로 휴일에 매일 공부했다. 사내 채용 시험에서 합격해 유통의 꽃이라 불리는 MD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간 막내가 되었다.

결혼식이 있어 지방에 가게 되었다. 친구가 말했다.

“니 그래 열심히 해서, 겨우 그거 받나? 그냥 여기 온나. 내가 월급 줄게.”

닭 쫓던 강아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촌에서 상경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허망했다. 돈을 주겠다는 친구의 말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옳은 방법으로 성공의 계단을 넘어왔다고 믿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했던 말은 며칠이 지나자 걱정으로 바뀌었다. 밀린 잠을 자고 낮에 일어날 때 쯤이면 그렇게 눈치가 보일 수 없었다. 거실에는 한숨만 가득했다. 도망치듯 고향을 빠져나왔다. 다시 서울.

아버지의 투병으로 집에는 돈을 버는 사람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겠다 마음 먹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MD 시절 배운 경험으로 의류 사업을 준비했다. 동대문 원단시장을 뛰어다녔다. 우연히 ‘서민 갑부’라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음식장사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씨앗호떡, 돼지갈비… 나는 요리에 능숙하지 못했다. 한 가지 ‘안 먹는 게’ 보였다. 부동산 경매였다. 의류 사업은 실패할 경우 집이 재기할 수 없을 지경으로 무너질 수 있었다. 부동산 영업은 내 몸뚱아리만 있으면 가능했다.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을 했다. 곧바로 부동산 공부를 시작했다. 며칠 후, 후배 앞에서 부동산이 왜 좋은 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그가 한 마디 했다.

"형, 부동산 영업해도 잘 할 것 같아요."

그렇게 인생의 방향이 급격하게 틀어졌다.



진태인 씨는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 바이어(MD)로 사회 첫 발을 내 딛었다. 부동산의 무한한 부가가치를 깨닫고 부동산 스타트업 영업직으로 입사했다. 수 년간의 영업직 경험을 바탕으로 집토스에서 사내 교육기관을 운영하며, 미래 사회가 필요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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