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은 교회마다 순교와 부흥의 역사가…[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1-12-10 17:17
수정 2021-12-11 00:09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진흙 바닥에 좌초된 것은 1866년 9월 4일. 이 배에는 영국 출신의 로버트 토머스 선교사(1839~1866)가 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 박해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다음 날 조선 관군들이 배에 불을 놓았다.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들었다. 토머스 선교사는 갖고 있던 한문 성경책들을 강변으로 던졌다. 배에서 뛰어내릴 때도 몇 권을 챙겼다. 그는 관군의 칼을 받기 직전 품고 있던 성경을 내밀었다. 관군은 주춤하다 칼을 휘둘렀고, 그는 대동강 쑥섬 모래밭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가 뿌린 성경을 주운 사람 중에 최치량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이웃 사람 박영식에게 성경을 줬다. 박영식은 질 좋은 종이를 한 장씩 뜯어 벽지로 도배했다. 소년은 자라서 박영식의 집을 사 여관으로 바꿨다. 그때 복음을 전하러 평양에 온 새뮤얼 오스틴 모펫 선교사와 한석진 목사가 이 여관에 머물다 성경으로 도배된 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를 계기로 복음을 들은 최치량은 예수를 받아들였다. 이웃들도 합류했다. 박영식도 그랬다. 널다리골에 있는 이 여관은 곧 예배 장소로 변했고, 평양 최초의 개신교회인 널다리골교회가 됐다. 이후엔 장대현교회가 돼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중심이 됐다.

평양 널다리골교회에 앞서 황해도 장연에서는 조선 사람에 의한 자생적 교회가 생겼다. 인삼 장사를 하던 서상륜이 만주에서 영국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 1883년 동생과 함께 소래교회를 최초로 세웠다. 이 교회는 신임 서양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육 장소로도 활용됐다.

장대현교회에서 뻗어 나간 산정현교회는 신사참배에 반대해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 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1939년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44년에 순교했다. 광복 후에는 공산군의 탄압으로 김철훈, 장일선 목사와 유계준 장로 등이 순교하거나 구금됐다. 이 교회 출신 교인들은 남한으로 피란 와서 전국 곳곳에 산정현교회를 세웠다.

3·1운동 과정에서도 개신교인들이 무수히 피해를 입었다. 일경에 체포된 교인이 전체의 17.6%인 3000여 명에 달했다.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체포자 470여 명 중 309명이 개신교도였다. 수원 제암리교회에서는 20여 명이 학살됐다.

이런 고난은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밀알’이 됐다. 유관순은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서울 정동제일교회에 다녔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던 유관순의 장례가 치러진 장소도 이곳이었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17년 전인 1902년에 순교했다. 이 교회의 벧엘예배당은 1897년에 건축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이다.


1887년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도 숱한 고난 속에 개신교 부흥의 주역들을 잇달아 길러냈다. 2019년에는 현대식 건물로 거듭났다.

1893년 설립된 상동교회(서울 남대문로)는 헤이그 밀사 파견의 역사적 현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곳에는 김구 이준 등 독립투사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1907년 이준 열사를 헤이그에 파견하는 문제를 이곳 지하실에서 논의했다.


1904년 서울 승동(현재 인사동)에 지어진 승동교회도 3·1운동의 진원지였다. 1917년 한옥 예배당을 지은 경북 울진 행곡교회는 울진 지역에 최초로 생긴 개신교 교회이자 ‘동해의 예루살렘 교회’로 불린다. 1909년에 설립된 경북 문경 점촌침례교회와 1910년 문을 연 목포양동교회 건물은 석조 예배당 건물로 유명하다. 1892년에 설립된 부산초량교회는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 1893년 대구·경북 지역 최초로 지어진 대구제일교회도 유서 깊은 신앙의 성소다.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한 지 155년이 된 지금, 한국은 미국에 이어 전 세계 선교사 파송 2위국으로 성장했다. 한때 ‘한국의예루살렘’으로 불렸던 평양은 공산주의 체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신앙의 무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