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야수(beast), 게임체인저(game changer). 애플이 지난 10월 공개한 반도체 'M1 프로', 'M1 맥스'을 지칭한 단어들이다. 이 칩들은 2020년 발표한 'M1'에 이어 애플이 자체 개발한 두 번째 노트북용 반도체다. 두 칩은 애플의 노트북 신제품 '맥북 프로'에 탑재돼 그래픽 처리, 연산 등 제품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기능을 담당한다. CPU GPU 뉴럴엔진 등이 한 칩에 탑재된 '통합칩셋(SoC)'다.
애플은 M1 프로와 M1 맥스를 내놓기 전부터 상당한 자신감을 나타냈다. 칩이 들어간 맥북 프로 출시 영상에선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가(What have we done)'라는 다소 낯 뜨거운 문구를 써가며 자화자찬했다. 영상에 출연한 애플의 고객사 직원들은 두 칩의 빠른 처리 속도에 놀라며 '마치 레이싱카 같다'는 등의 감탄사를 쏟아냈다. 통합메모리 등 반도체 설계·구조 상의 혁신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럴만했다. M1프로와 M1맥스에 탑재된 CPU(중앙처리프로세서)는 1년 전 선보인 M1 CPU보다 70% 빠른 성능을 자랑한다. M1맥스의 GPU(그래픽처리프로세서) 성능은 M1보다 4배 빨라졌다.
애플은 다른 제품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새로운 M1 시리즈의 고성능·저전력을 입증했다. CPU 성능은 경쟁사의 최신 8코어 CPU 칩을 쓴 노트북보다 1.7배 효율적이었고 같은 성능에선 전력을 70% 적게 썼다. GPU 성능 역시 경쟁 제품 대비 같은 전력 구간에서 7배 빠르다고 강조했다.
요즘 업계에선 "애플의 혁신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반도체, 즉 '애플 실리콘'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자는 7일 애플에서 아이폰, 맥북 등 주요 제품의 반도체 SoC 개발을 담당하는 팀 밀렛(Tim Millet) 플랫폼·아키텍처팀 부사장과 톰 보우거(Tom Boger) 맥 프로덕트 마케팅팀 부사장을 만나 애플 실리콘의 혁신 비결에 대해 물어봤다.
애플은 △통합메모리 등 칩 설계·구조 상의 혁신 △10년 이상 진행된 소수 정예 연구진의 연구개발(R&D) △외부 판매가 아닌 자사 완제품을 위한 개발 △협력사 최신 기술 활용 등을 꼽았다. D램을 패키지 내부에 탑재해 효율성 높여 저전력·고성능의 비결로는 우선 '통합메모리'가 거론됐다. 과거엔 노트북용 CPU와 GPU에 각각의 전용 메모리반도체가 배치된다. 개별 메모리를 갖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느린 인터페이스에서 데이터를 주고 받게된다. 더 많은 전력도 필요했다.
애플은 메모리반도체를 반도체칩 패키지 내부에 탑재하는 혁신을 선보였다. CPU와 GPU 등이 메모리반도체까지 접근하는 시간을 확 줄인 것이다. 또 메모리 대역폭(초당 바이트 전송 능력)을 CPU와 GPU가 나눠 쓸 수 있게 됐다. 밀렛 부사장은 "D램(메모리반도체)이 GPU에 가깝게 됨으로서 GPU가 필요로하는 대역폭을 쓰는 게 가능해졌다"며 "추가로 CPU의 대역폭도 높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칩 구조를 바꿔 확장 가능성(Scalable)을 높인 것도 비결로 꼽혔다. 단일 칩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성능을 높일 수 있도록 구조를 개선했다는 얘기다. 밀렛 부사장은 "원하는 수준의 전력 효율성을 달성하려면 SoC와 메모리를 하나의 단일 패키지로 만들어야한다"며 "그래서 D램과 SoC를 최대한 가깝게 배치해 패키지 형태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애플 반도체 성능은 철저하게 '제품'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다고 애플 부사장들은 강조했다. '최고의 반도체' 제작이 목표가 아니라 '최고의 아이폰', '최고의 맥북'을 위해 반도체를 개발하다보니 괴물 같은 칩이 나왔다는 것이다.
밀렛 부사장은 " M1 프로의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M1 대비 2배 수준이지만 이것이 개발 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며 "제품의 우수한 성능과 기능을 지원하는 가장 적합한 수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것을 목표로 칩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이어 "애플은 외부 판매 목적이 아니라 우수한 완제품(아이폰, 맥북 등)을 뒷받침하기 위해 반도체를 개발한다"며 "칩 제조 과정에선 5nm(나노미터) 공정 같은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노력한다"고 덧붙였다.애플의 반도체 자립은 스티브 잡스의 뜻...10년 전부터 M1칩 개발현재 애플을 벤치마킹해 구글, 아마존, 테슬라 등이 자체적으로 반도체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애플은 언제, 누구의 결정으로 자체 칩 개발에 나섰을까. 애플 부사장들은 "고성능 반도체 자체 개발은 고(故) 스티브 잡스의 유산"이라고 입을 모았다.
밀렛 부사장은 "스티브는 '원하는 제품을 제약 없이 만드려면 모든 주요 기술을 소유해야한다'고 생각했다"며 "최고의 아이폰을 위해선 반도체가 중요하다는 부분을 인지했고 더 나아가 최고의 아이패드, 애플와치, 맥 제품에도 적용됐다"고 말했다. 밀렛 부사장은 잡스가 반도체 자체 개발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던 2005년 애플에 합류했다.
보우거 부사장의 의견도 같았다. 그는 "애플의 성공적인 전략엔 통합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다"며 "자체적으로 반도체와 OS(운영체계)를 개발함으로써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더 긴밀하게 통합했고 이는 경쟁사가 못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M1프로와 M1맥스 출시는 10년 전부터 기획됐다는 게 애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반도체 개발 인력과 관련해선 "사람 수가 많지는 않지만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밀렛 부사장은 강조했다. 그는 "먼저 아이폰용 반도체 팀이 구성됐고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조금씩 확장을 하면서 팀의 역량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며 "확장 가능한 아키텍처(구조) 덕분에 아이폰, 아이패드, 맥에 들어가는 CPU 등을 동일하게 사용하면서 소규모 팀이지만 높은 수준의 제품 품질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M1 프로·맥스의 높은 전력효율성...전원 연결 여부 관계 없이 고성능 반도체의 혁신이 맥북 프로의 강력한 그래픽 성능으로 이어졌다는 게 애플의 설명이다. 보우거 부사장은 "과거 노트북에선 그래픽에 대한 메모리반도체 용량이 16GB로 제한됐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GPU가 접근할 수 있는 메모리가 많다"며 "이로 인해 맥북은 3D 애니메이션 등 그래픽 집약적인 프로그램을 매끄럽고 원활하게 실행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맥북 프로가 전원이 연결됐을때와 안 됐을 때 모두 동일한 성능을 낼 수 있는 것도 M1 프로와 맥스 칩이 뒷받침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보우거 부사장은 "과거 고사양 노트북을 사용하려면 배터리 성능을 포기해야했다"며 "M1 시리즈의 높은 전력 효율성 영향으로 맥북 프로는 전원을 연결했을 때와 안 했을 때 동일한 성능을 낸다"고 설명했다.
밀렛 부사장은 "반도체와 OS, 소프트웨어가 잘 조합되면서 결국 영상작업, 음악제작, 소프트웨어 개발, 3D 콘텐츠 제작 능력을 높였다"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트북이 됐다"고 평가했다.
향후 반도체 칩 개발 때 주력할 분야에 대해선 그래픽 성능 등을 꼽았다. 밀렛 부사장은 "CPU, GPU, 뉴럴엔진의 중요성은 계속 대두될 것"이라며 "그밖에 비디오 엑셀러레이터의 성능도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플은 2020년에 '향후 2년 간 노트북용 칩을 자체 개발 반도체(애플실리콘)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년 간의 변화에 대해 보우거 부사장은 "2020년 선보인 M1칩이 대중적이고 상대적으로 컴팩트한 제품에 적용됐다"며 "올해 나온 M1프로와 M1맥스는 고사양 제품용 칩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애플은 앞으로도 반도체 성능의 한계를 뛰어넘는 제품 개발을 위해 힘쓸 계획이다. 업계에선 M2칩, 애플의 아이폰용 5G 모뎀칩 등 차기 칩에 대한 루머가 쏟아지고 있다. 밀렛 부사장은 "제품 사양이나 협력사와의 관계 등에 대해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애플실리콘의 미래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며 "반도체 기술이 상당히 성숙했지만 애플 실리콘을 통한 혁신에는 아직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다양한 기기에 자체 개발한 고성능 반도체를 계속 탑재하겠다는 얘기로 풀이된다. 보우거 부사장은 "아이폰13 같은 제품이 고객의 삶을 개선하는데서 자긍심을 느낀다"며 혁신제품 개발 및 판매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