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인재를 놓치는 것은 손실이지만 최고경영자(CEO)가 구속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한 중견기업 채용담당자의 말이다. 내년 1월 27일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직원 채용 시 “조금이라도 아픈 사람은 뽑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한 기업까지 나오고 있다. 자칫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을 뽑았다가 재해로 이어질 경우 CEO가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해서다.
최근 몇 년 새 배송 서비스로 급성장한 A사는 하반기부터 배송기사 채용 절차를 강화했다. 이전까지는 간단한 면접 후 유급 운전연수 기간을 거쳐 별 이상이 없으면 채용해 왔지만 하반기부터는 운전연수를 통과했더라도 지정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하고, 심혈관계 질환과 관련한 ‘질병 코드’가 나오면 채용을 거부하고 있다.
대형 외국계 기업 B사도 마찬가지다. 새벽 출근이 많고 혼자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일이 종종 있는데, 이 회사는 신검에서 ‘재검’ 판정만 나와도 채용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 기업 인사담당자는 “외국인 CEO가 형사처벌을 받으면 본국으로 못 돌아갈 것이란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KMI 한국의학연구소에 따르면 KMI가 수행한 채용 건강검진은 2019년 6만971건, 지난해 5만6636건이었지만 올해는 11월까지 7만4294건에 달했다. 코로나19로 채용시장이 얼어붙었는데도 역대 최고 기록이다.
엄격해진 채용 절차로 인한 법적 분쟁도 늘고 있다. A사에선 운전연수에 합격한 지원자가 신검 이후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자 ‘부당해고’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근로자는 억울하지만 건강을 이유로 채용을 안 하는 기업을 제재하는 게 가능한지도 쟁점이다. 장애인 차별이 아닌 한 별다른 제재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7일 내놓은 ‘중대재해법 가이드’에서 심혈관계질환이나 과로사는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고용부의 축소해석은 법적 근거가 분명치 않아 법원이 그대로 따르리란 보장이 없다”며 “기업들의 공포가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고 했다.
중대재해법으로 인해 지금까지는 요식 절차였던 건강검진이 이제는 당락을 가르는 중요 변수가 됐다. 처벌 수준은 높지만 지켜야 할 의무는 모호해 기업들이 아예 채용단계에서부터 몸을 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자는 취지는 좋지만 엉성한 입법 탓에 채용 문턱만 높아지는 사태에 ‘일자리 정부’가 어떻게 반응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