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명문대학 UC버클리가 앞으로 박사과정 입학생 선발에서 GRE(대학원입학자격시험) 성적을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현지 교수와 학생들에게 확인해보니 내년부터 많은 학과에서 그런 방향으로 박사과정 신입생 전형을 추진한다고 했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물리적 어려움 때문에 GRE를 반영하지 않은 것과 전혀 다른 구조적 배경이 깔려 있다. GRE 성적과 박사과정 성취도 사이에 의미있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통계적 방증에 근거한 것이다. 높은 GRE를 받고 입학했지만 질문과 토론으로 이뤄지는 박사과정 수업에서 소극적이고 조용한 아시아 학생이 주요 타깃이라고 한다. 특히 백인 중심의 대학원생 노조가 이런 목소리를 높여왔다고 전해졌다.
그들 눈에 비친 아시아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존재다. 질문을 던지는 데 소극적이고, 교수나 동료 학생의 질문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아시아 학생에겐 ‘교수와 학생이 같이 만들어내는 수업에 제대로 공헌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씌워져 있다. 왜 그럴까. 영어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영어를 중·고등학교부터 만난 1960년대도 아닌데. 글로벌화, 경제 성장, 조기 국제교류의 물결을 탄 19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유학생에게 영어는 더 이상 그들 부모 세대가 경험했던 장벽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학생들은 수업에서 모르는 게 나오면 ‘내 수업 준비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나중에 혼자 공부하거나, 친구에게 물어본다. 미국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해결하려고 한다. 질문은 모르는 것을 해소하는 문이다. 한국 학생, 나아가 아시아 학생들은 질문에 소극적이다.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자신의 질문이 동료 학생들에게 조롱과 비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을까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입학금을 내고 학문을 배우기 위해 진학한 대학에서 그 분야를 오래 천착해온 교수에게 질문하는 것은 모든 학생에게 보장된 권리다. 배우려고 입학한 대학에서 ‘바보 같은 질문’이란 있을 수 없다. 배움의 전당에서 모든 질문은 평등하다. 교수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신이 아니다. 질문이 그들을 더 연구하게 한다. 그래야 대학이 지성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의 그룹 발표수업에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의 발표에만 열중한다. 다른 그룹의 발표에 대한 질문은 드물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방적인 발표, 검증되지 않은 주장, 논박 없는 발표의 연속. 거기에 치열함도 생동감도 없다. 질문을 종용하면 누가 질문할까 상대방의 얼굴만 쳐다보며 멀뚱멀뚱해 한다. 질문도 자꾸 해봐야 익숙해진다. 질문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 자신의 논리가 단단해질 리 없다.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이 그런 행동방식을 따르다 보니 문제의 심각성은 대학 시절까지 부각되지 않는다. 세상은 학교와 전혀 다른 곳이다.
후발주자로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낸 대한민국. 모두 앞서간 국가에 배워서 따라잡았다. 치열한 학습의 시대였다. 모범답안을 외우고 반복하는 것이 학습의 요체였다. “왜 그런가요?”라는, 선생을 당황하게 하는 질문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유형별 예상 시험문제를 무수히 풀고 또 풀고, 외우고 또 외워서 명문대학에 진학하면 사회 진출 입장권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다. 추격의 시대 당시 학습방법은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하는 청년세대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학 진학 그 자체가 경쟁자산이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지나갔다. 대학생은 넘쳐나고, 이들이 대학 문을 열고 나오면 세상은 4지 선택형 문제를 들고 기다리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시대.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실마리는 익숙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질문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교육풍토,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세대는 미래로 가는 지도를 그릴 수 없다. 그런 지도가 없다면 애써 쌓아올린 산업화, 민주화의 과실을 앞으로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문제의 심각성을 한국 교육은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