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역사상 국제무역 가장 활발했던 고려…인삼·청자 찾아 마팔국·아라비아서 오기도

입력 2021-11-22 09:02

시대와 백성들이 선택한 고려는 출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업과 무역이 발달한 국제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통일을 성취하기 전인 924년에도 7월에는 상선이, 10월에는 사신선이 황해를 건너가 산둥반도 북부의 등주(펑라이)에서 후당과 무역을 벌였다. 정국이 안정된 11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송나라는 운하도시인 동경(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상업과 무역을 추진했다. 거란을 의식하고 고려의 편의를 위해 국가항구를 산둥반도의 남단인 판교진(지금 산둥의 고현)으로 옮기고, 무역 업무를 도와주는 ‘시박사’라는 관청까지 설치했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상업의 중심지를 남쪽으로 옮겼다. 1078년에는 명주(닝보우)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주산군도로 들어가는 진해(칭하이)에 고려 사신과 상선들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117년에는 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

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는 민간무역이 발달했다. 기록을 보면 송나라 상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012년부터 북송이 멸망하는 1278년까지 266년 동안 무려 129회에 걸쳐 약 5000명이 왔다. 송 상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산둥성이나 장쑤성 북부 해안이 아니라 저장성, 푸젠성, 광둥성 등 주로 강남 출신이었다. 기록된 출발지를 보면 푸젠성 남부의 천주(대만 건너)가 19회, 그 위의 복주가 2회, 저장성의 영파인 명주가 3회 등이다. 1090년 이후에도 훗날 마르코폴로가 세계 최고라고 극찬한 천주항의 상인들이 20회 이상 왔다. 아라비아 상인도 많이 와서 1024년에는 대식국(이란 및 아라비아 지방)의 상인 100여 명이 한 번에 왔다. 다음 해인 1025년과 1040년에도 대거 방문했다. 주로 향료, 물감, 조미료 등 동남아시아와 인도 지역의 특산물을 중계무역했다. 하지만 마팔국(인도), 삼라곡국(태국), 교지국(베트남) 등의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무역을 했다. 동아지중해의 항구도시인 개경한강과 예성강이 경기만과 만나는 강화도 해역은 왕건 세력의 토대였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랴오둥반도, 산둥반도 등과 교류할 때 가장 효율적인 해양환경과 무역환경이 갖춰진 장소였다. 거기다가 정부는 개경 앞인 예성항에 벽란도(부두)를 설치해 입출항과 하역을 편하게 만들었다. 개경에는 사신과 상인들이 머물면서 무역을 하는 객관들이 오빈관, 영은관, 영선관 등 10여 개나 있었다. 개성은 다양한 인종과 물건이 모여드는 동아지중해의 유명한 국제도시였다.

1123년에 사신단으로 온 송나라의 서긍은 한 달간 머물면서 자료를 모아 귀국한 뒤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사신선들이 개경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즉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저자를 만들고는, 온갖 물건을 진열했다. 또 해안에는 1만여 명의 사람이 무기, 갑마, 기치, 의장들을 늘어세우고, 구경꾼들은 담장처럼 모여 있다고 했다.

무역활동에 적극적인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송나라와 무역을 계속했다. 상인들이 여러 차례 들어왔고, 원나라와도 무역을 했다. 일본과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 상인들이 활동하던 규슈 북부의 다자이후(太宰府)를 이용해 무역을 벌였다. 고려, 무역 질서 활용 국가정책 성공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무역국가였다. 경제력이 강했고, 국제적인 사회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성과를 거두었을까.

첫째는 계승성이다. 국제무역이 활발했던 통일신라의 물류망, 인적네트워크, 기술력은 물론이고 사회적 필요성과 인식, 국제적인 감각도 신라를 계승했을 것이다.

둘째는 국제적 환경의 변화와 관계다. 고려 전기에는 송나라가 중국의 분열을 종식하고 무역중시 정책을 추진했다. 송나라는 상업과 무역업이 극도로 발달했고, 조선술과 항해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서아시아에서는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의 무역망을 장악했던 아랍 세력과 이슬람교도들이 한동안 셀주크 튀르크에 억압받다가 아바스 왕조가 부흥에 성공해 인도의 일부 지역까지 장악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크메르 왕국이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며 무역왕국으로 번창하는 중이었다. 이처럼 지중해, 페르시아만, 인도양, 동남아시아, 동아지중해에 이르는 해양유라시아 세계에서는 해양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무역이 활발한 시대였다.

셋째는 국가정책과 시대정신이다. 왕건은 경기만의 해양무역상 출신이었고, 지지세력도 주로 범해양 호족세력이었다. 그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상업과 무역이 중요함을 인식했으므로 무역에 비중을 두는 정책을 추진했을 것이다.

넷째, 해양활동 능력 발전과 해양력 향상이다. 무역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토대는 내부적으로는 산업의 발달이지만, 실제로 필수적인 요소는 ‘조선술’ ‘항해술’ 등의 기술적인 능력이다. 고려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나 등거리 외교를 기본으로 삼은 외교정책에서 성공을 거뒀다. √ 기억해주세요 고려와 송나라는 보통 100명에서 300명이 승선한 선박을 이용해 상당한 규모의 공무역을 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의복, 상아, 물소뿔, 옥제품, 술, 새(鳥), 차, 칠제품, 악기 등을 수출했다. 반면에 고려는 비단, 금제품, 은제품, 나전 세공품, 꽃방석(화문석), 자개박이 그릇, 인삼, 소나무, 부채, 종이, 붓, 먹, 가죽 등 수 천 점을 수출했다. 1078년에는 송나라가 무려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물건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