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리어왕과 포퓰리즘 공약

입력 2021-11-18 17:30
수정 2021-11-19 00:08
“어린 게 친절하지 않다(So young, and so untender).” 판단력을 상실한 리어왕은 직언을 한 딸 코델리아에게 이런 이유를 대면서 쫓아냈다. ‘입에 발린 말’로 자신의 기분을 맞추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과 분노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은 인간의 어리석고 어두운 본성을 정면으로 건드렸기에 시대의 한계를 넘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단순히 세상 물정 모르는 노인의 투정, 늙은 부모의 재산을 탐하는 악인을 다룬 삼류 사기극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작품 속에서 21세기 현대사회가 지닌 ‘날것’의 모습까지 생생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거짓말, 담백한 진실최근 이순재, 송승환 등 유명 배우들이 앞다퉈 ‘리어왕’ 역으로 연극무대에 나선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펼쳐봤다. 17세기 초에 쓰인 비극 중 현대인은 과연 어느 부분에서 공감할 점을 찾아낼까. 듣기 좋은 허언(虛言)은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그 감언(甘言)을 받아들인 결과는 치명적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불효자 고너릴의 대사는 영문 원본 기준 7행에 61개 단어가 한 문장을 이룬다. 아버지가 자신의 눈보다, 넓은 천지나 자유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등 온갖 빈말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반면 진심을 담은 코델리아의 말은 짧은 한마디뿐이다.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버지(Nothing, my lord).”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천륜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화려하고 장황한 거짓과 짧고도 매력 없는 진실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장면에서 오늘날의 모습이 절로 오버랩된다. 불과 100여 일 앞으로 대선이 다가오면서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듣기 좋은 말들의 성찬이 벌어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 및 기본주택 공급, 20대 소득세 면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50조원 규모의 자영업자 손실 보상으로 맞불을 놨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도 1000만원 규모의 군필자 사회진출지원금 지급을 주장하며 유권자의 눈길을 끌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모두가 ‘그럴싸한 말’ 잘하기 경쟁에 나선 듯한 모습이다. '현대판 리어왕'이 돼서야…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수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수없이 많은 공약(空約)을 경험해왔다. 일부는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가 돼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최근 수년간만 되돌아보더라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무리한 탈원전 정책 추진, 서민의 주거난만 가중한 임대차 3법 등이 그랬다. 화려한 언변,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됐지만 실상은 국민의 등에 칼을 꽂은 정책이 한둘이 아니다.

리어왕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한 악인들에게 자신의 왕국을 떼어주고 ‘벼락 거지’가 되고 나서야 진실의 눈을 떴다. 반면 주요 대권주자의 사탕발림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한국 유권자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웬만한 자극에는 반응도 없는 듯, 더욱 듣기 좋은 말만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서 모두가 ‘현대판 리어왕’이 되고자 하는 듯한 걱정이 들 정도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이라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 리어왕의 마지막 대사다. ‘온 세상이 연극무대’라고 했던 셰익스피어의 말이 예사로 다가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