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백악관 요구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반도체 정보를 미국 정부에 제출한 가운데 이 같은 사태가 향후에도 재연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어느 때보다 미국 정치권과의 '스킨십'이 중요한 때 곧 미국 출장길에 오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리스크 제거에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실린다.이재용 부회장 미국 출장 '초읽기'1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미국 내 삼성전자와 관련한 각종 현안을 챙기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하고 시기를 조율 중이다. 지난 8월 가석방 후 매주 목요일마다 삼성물산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과 관련된 재판에 참석해 왔던 이 부회장은 11일 재판 이후 다음 재판은 2주 후인 26일로 예정됐다. 18일이 대학수학능력시험 당일로, 이날 재판이 열리지 않게 되면서 이 부회장에게 2주가량 시간이 생겼다. 이 시기에 미국을 다녀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 부회장이 미국 출장을 가면 지난해 10월 베트남 출장 이후 13개월 만에 해외 현장 경영을 재개하는 것이다. 특히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약 170억달러(한화 약 20조원) 규모의 미국 신규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 투자에 대한 최종 조율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적 금액이 투입되는 만큼 미국 정부 지원은 필수적이다. 기업 수장인 이 부회장이 직접 현지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 관련 작업을 마무리해야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신규 파운드리 공장 대상지로는 미국 내 5개 후보 지역 중 텍사스주 테일러시가 유력 후보로 꼽힌다. 오스틴시와 애리조나주의 굿이어·퀸크리크, 뉴욕시 제네시 카운티 등도 유치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오스틴 파운드리 제1공장을 방문할 가능성도 높다. 현지 라인을 점검하고 고객사를 만나 소통에 나서는 차원이다. 실제로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주변에는 엔비디아·퀄컴 등 삼성전자 고객사들이 위치해 있다. 일각에선 이 부회장이 퀄컴의 크리스티아노 아몬 최고경영자(CEO)와 미팅을 가질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미국의 반도체 정보 추가 제출 요구 대비해야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정이 있다. 미국 정치권과 행정부 인사들을 만나 반도체 정보 추가 제출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고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기업들 입장을 대변하는 일종의 '스피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 부회장 정도 되는 인사라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재계 설명이다.
최근 미국의 정보 제출 요구에 삼성전자는 고객 정보, 재고량 등 기업 내부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뺐다. 제출 자료 모두 기밀로 표시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SK하이닉스도 최소한의 내용만 넣고 일부 자료는 기밀로 표시해 냈다. 재고량도 제품별이 아닌 컴퓨터용 등 산업별로 뭉뚱그려 제출했다.
기업들은 일반에 공개해도 되는 자료와 그렇지 않은 자료를 분리해서 낼 수 있으며 기밀로 표시된 자료는 미국 정부만 열람할 수 있다. 세계 파운드리 1위 업체인 대만 TSMC도 지난 5일 고객사 등 기밀 정보를 빼고 비공개로 자료를 제출했다. UMC, ASE, 글로벌웨이퍼스 여타 대만 기업들이나 미국 마이크론, 이스라엘 타워세미컨덕터 등도 자료를 제출했다.
문제는 미국 정부가 이들 기업이 제출한 정보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추가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국방물자생산법'(DPA)을 거론하며 "강력하고 완전한 데이터 제출에 모두 협조적이었다"면서도 "자료가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으면 추가 조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정부의 외교적 역할과 함께 이 부회장의 네트워크가 시너지를 낼 필요가 있는 대목.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자료 제출 시한 하루 뒤인 지난 9일 미국을 방문해 러몬도 장관과 면담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 정부와 반도체 공급망을 재점검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이후 이 부회장이 미국을 방문해 한 번 더 우리 측 입장을 설명하고 미국 투자를 늘리는 등의 대안을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예상된다."미국에서도 이재용 만나려는 인사들 많아"
재계 관계자는 "미국의 반도체 정보 공개 요구는 경제적 측면보단 안보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반도체가 이미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신(新)무기' 혹은 '경제적 무기' 영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정부나 기업이 개별로 대응해선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각 기업들이 제출한 정보를 토대로 미국이 분석을 끝내면 그때부터 제재 혹은 혜택 등 기업별 차등 대우가 나타날 수 있다"며 "오픈되지 않은 반도체 정보를 따로 제출하면서 미국을 대우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등 세련된 경제 외교 전략이 필요한 시기"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관계자는 "미국 주 정부에 세제 혜택을 요구하며 일자리 마련을 당근으로 내놓는 방식도 미 정치권 인사들을 삼성전자 우군으로 만드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며 "미국에서 이 부회장을 만나려는 인사들이 상당히 많다. 관련 사안들이 현장에서 빠르게 결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 부회장의 이번 출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관측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