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보수주의가 키운 '북유럽 복지 설계자'

입력 2021-11-04 18:15
수정 2021-11-05 02:15

적잖은 이들이 이 땅에서 실현되길 갈망했고, 수십 년간 열띤 논쟁을 벌였건만 정작 그 실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대상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 노르딕 경제 모델 말이다. 북유럽 복지 모델을 구축한 울로프 팔메 전 스웨덴 총리 역시 ‘미지의 존재’로 남아 있긴 마찬가지다. 인류의 미래를 밝힌 진보주의자, 불공정에 맞서 싸운 투사, 평화의 전도사라는 막연한 칭송 외에 그의 실제 행적을 알려주는 정보는 한 줌에도 못 미친다.

《울로프 팔메》는 낯익은 듯 낯선 존재인 팔메 전 총리의 일대기를 꼼꼼하게 소개한 책이다. 10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에다 지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상세하게 팔메의 전 생애를 담았다. 스웨덴 언론인이자 역사가가 스웨덴어로 쓴 책을 스웨덴사를 전공한 전문가가 성실하게 옮겼다.

흔히 팔메 전 총리는 진보정치의 표상으로 꼽힌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팔메는 단순히 진보적 인물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 그의 인생 후반부 정치 역정은 유년 시절 받아들인 보수주의의 풍족한 자양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구상주의 작품을 완전히 익힌 뒤 추상화의 세계를 열었던 것처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토양이 없었다면 스칸디나비아 복지사회는 태어날 수 없었다.

팔메는 ‘금수저’ 출신이었다. 부촌인 ‘외스테르말름’에서 19세기 이후 발렌베리 가문과 협력과 경쟁을 이어온 명문가의 일원으로 자란 그는 특권적인 경제적 지위를 누리면서 보수적 세계관의 세례를 받았다. 스웨덴 귀족의 ‘마지막 보루’라는 기병 부대에서 복무했고, 사회생활의 첫발도 보수 신문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에서 내디뎠다.

그는 넓은 세계를 직접 접하며 시야를 틔웠다. 어렸을 때부터 독일어와 프랑스어 교육을 받으며 세계주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장학금을 받고 미국 케니언칼리지에서 유학했으며, 1950년대 초엔 학생지도자로서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등 유럽 곳곳을 돌아봤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파리에 오랜 기간 머물기도 했다.

타게 엘란데르 총리의 통역으로 스웨덴 정계에 입문한 뒤론 탄탄대로를 걸었다. 단순한 비서업무와 통역에 머물지 않고 핵심 조력자로 거듭났다. “팔메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나도 움직일 수 없다”고 엘란데르 총리가 말할 정도였다.

그의 발걸음엔 거칠 것이 없었다. 서른 살이던 1958년 스웨덴 상원에 입성했다. 36세에 정무장관이 됐고, 교통통신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을 두루 맡았다. 그는 자기 세대를 위해 또렷한 음성과 참신한 말로 한껏 노래했다. 41세 때인 1969년엔 집권 사회민주당 대표이자 총리에 선출됐다. 유럽 최연소 총리가 된 뒤 노를란드와 키루나 광산 파업, 경제난과 대량 실직, 노르말름스토리 광장 인질 납치극 등 시련이 닥쳤지만 정면 돌파해나갔다.

팔메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엇갈렸다. 지지자들로부턴 ‘스웨덴의 케네디’로 불렸지만 반대파들은 수퇘지에 ‘울로프’라는 이름을 붙이고 조롱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시대의 과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1960년대엔 복지국가의 기초를 정립했고, 1970년대에는 개혁을 진두지휘하며 스웨덴을 서구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는 높아진 생활 수준과 커진 사회복지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강한 사회’가 개입해야 한다고 봤다. 노동조합의 지위 강화, 국가의 권한 확대와 같은 평이 엇갈리는 논쟁적인 조치들이 이어졌다. 1976년 실각했다가 1982년 총리로 복귀한 뒤엔 냉전에 맞서 군축과 집단 안보를 부르짖었다.

팔메가 유럽 변방의 그저 그런 정치인에 머물지 않고 시대를 초월해 주목받는 배경에는 이념에 얽매이지 않던 모습이 큰 역할을 한다. 그는 경제·복지 정책에서 교조적인 태도를 고집하지 않고 삶의 개선이라는 실질에 주목했다. 냉전과 식민지 해방, 베트남 전쟁, 핵무기 문제에선 미국과 소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서방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했고,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과 만나는 등 진영 정치를 거부했다.

드라마 주인공과도 같았던 삶은 마지막까지 극적이었다. 1986년 스톡홀름 중심가에서 영화를 본 뒤 집으로 돌아가다 한 남자가 쏜 권총탄을 맞고 숨졌다. 암살범의 정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 최후는 팔메에게 한 시대와 가치를 대표하는 불멸의 아우라를 씌웠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