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통 딛고 돌아온 리디아 고 "더 즐기는 골퍼 되고 싶다"

입력 2021-11-04 16:45
수정 2021-11-04 16:52


'천재소녀'. 그의 앞에 늘 따라붙던 수식어였다. 5살에 처음 골프채를 잡은 뒤 2012년 호주여자프로골프(ALPGA)투어 NSW오픈에서 14세의 나이로 최연소 우승기록을 세웠고 같은해 8월 아마추어로 캐나다퍼시픽 오픈에서 우승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최연소 우승 기록을 새로 썼다. LPGA 투어가 '18세 이상'이라는 입회 조건을 파격적으로 수정해 16세 회원을 받아들인 것도 그였기에 가능했다.

최근 서울 도곡동에서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리디아 고(24·뉴질랜드)는 "'천재소녀'라는 말은 언제나 큰 부담이 됐다"고 털어놨다. "저에게는 늘 거리감이 느껴지는 타이틀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좋은 기회가 많이 주어져 우승도 하고, 제가 꿈꾸던 메이저 대회 우승도 일찍 거뒀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기에 성적이 안나왔을때 더 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지요."



리디아 고는 여자골프 세계랭킹 7위의 톱 랭커다. 서울에서 태어나 6살에 뉴질랜드로 터전을 옮긴 대표적인 한국계 골퍼이기도 하다.

그의 10대는 영광으로 가득했다. 2014년 16살의 나이로 프로에 데뷔한 뒤 2015년 2월 남녀 골퍼를 통틀어 최연소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2015년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최연소 우승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ANA인스퍼레이션까지 석권하며 최연소 메이저 2승 기록도 세웠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뉴질랜드에 귀한 은메달도 안겼다. 10대 시절에만 무려 14승을 거뒀다.

하지만 어린 천재에게 닥친 성장통은 만만찮았다. 2018년 메디힐챔피언십에서 15승을 올린 뒤 우승 소식이 멈췄고 리더보드 상단에서 이름을 찾기 어려워졌다. 2019년 하반기 12개 대회에선 20위 안에 한 차례도 들지 못할 정도로 부진했다. 그러자 "2017년 섣부르게 새 용품사와 계약하고 캐디, 코치도 한꺼번에 바꾼 탓"이라는 호사가들의 말도 따라다녔다.

2021년, 그는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시즌 초 두번의 준우승을 거두며 시동을 걸었고 지난 4월 하와이에서 열린 LPGA 투어 롯데챔피언십에서 3년만에 통산 16승을 달성했다. 8월 도쿄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따내며 올림픽 두 대회 연속 메달리스트 기록을 세웠다. 올 시즌 18개 대회에서 8번 톱10에 들며 전성기 못지 않은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소녀'를 떼어내고 '골프천재'로 한번 더 비상을 시작한 셈이다.

리디아 고는 올해에 대해 "프로로 활동한 지난 8년 중 가장 알찬 한 해"라며 만족감을 보였다. "4월 롯데챔피언십에서 오랜만에 우승하면서 '나는 우승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다시 느꼈고 각 국 대표 선수들이 모인 올림픽에서 동메달도 따냈죠. '이 자리에 다시 올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한 한 해였습니다." 그는 "올림픽 메달은 아버지가 한국 집에 소중하게 보관 중이셔서 아직 저도 못봤다"며 웃었다.

10대에 맞은 영광이 컸기에 20대 초반 닥친 부진은 더욱 아팠을 터다. 그는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제 자신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신감이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지난해 타이거 우즈의 코치를 역임했던 숀 폴리를 새 스윙코치로 만난 뒤 큰 도움을 얻었다. 그간 난조를 보이던 드라이버샷이 다시 리듬을 회복하면서 숏게임, 퍼팅의 부담감이 줄어들었다.

"새 코치는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내가 무언가 더 하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고 말해줬요. 가족과 후원사들도 '리디아의 행복이 우선'이라며 믿고 기다려주셨어요. 골프는 개인 스포츠이지만 혼자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리디아 고의 멘토로, 한국에 오면 꼭 만난다는 축구선수 이영표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2년 전 쯤 "지금 당신이 연습하는 것은 지금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지만 지금 투자한 것이 3~5년 뒤에 실력으로 나올 수 있다. 지금 당장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다독여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묵묵히 힘든 시간을 견디며 훈련했다. 그는 "우승을 하면 그 순간이 행복하긴 하지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며 "그저 '지금은 우승할 때가 아니구나'하고 편하게, 묵묵하게 저 자신에게 집중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근육량도 늘렸다. 코로나19로 시즌이 중단되며 생긴 6개월간의 '강제 휴식기간', 그는 요가와 필라테스, 근력운동으로 근육량을 7kg 가까이 늘렸다. 코로나19로 체육관이 문을 닫자 집에 피트니스 기구를 들여놓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했다. 그의 트레이너인 크레이그 데이비스가 "리디아처럼 운동했다면 걷지 못했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그렇게 긴 겨울을 보낸 리디아 고는 올 시즌 시작부터 부활의 시동을 걸었다. 두 차례 준우승을 거뒀고 3년만에 통산 16승을 이뤄내며 '천재의 귀환'을 알렸다.


리디아 고의 특기는 무서운 뒷심이다. 경기 초반에 다소 부진하더라도 이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마지막 라운드에는 어느샌가 리더보드 상단에 올라있기 일쑤다. 지난달 24일 부산에서 막을 내린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첫날 1 오버파로 공동 61위에 그쳤던 그는 2라운드부터 버디를 몰아쳤고 최종일에만 8타를 줄이며 공동 3위로 마무리했다.

그는 "도쿄 올림픽 이후 코스 공략을 공격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림픽에서는 1, 2, 3등만 메달을 받을 수 있잖아요. 메달을 꼭 따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시합보다 과감하게 쳤는데 동메달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으면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는 "이전에는 방어적인 플레이를 했는데 이젠 공격적인 플레이를 즐기게 됐다. 때로 실수하기도 하지만 자신있게 치면 방어적으로 칠 때보다 스코어가 잘 나오고 성적도 따라오는 것 같다"며 "골프는 마지막 홀 퍼트 들어갈 때까지 끝난게 아니잖나"며 웃었다.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또다시 스윙과 코치, 클럽을 모두 바꾸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그는 "역시 변화를 선택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10대 시절, 그때에 맞는 코치와 캐디, 클럽이 있었고 그분들 덕에 우승을 많이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상황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계속 좋은 성적을 이어갔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언젠가는 바뀌고, 성장하고 변화하니까요. 지금이 제가 느끼기에는 가장 자유롭고 자신있는 상태입니다." 언젠가는 겪었을 성장통을 잘 이겨냈다는 자신감이 배어났다.



리디아 고는 최근 알려진 자신의 연애 사실에 대해서도 당당했다. "그는 골프가 100%였던 제 삶에 골프 외의 행복을 알려준 소중한 사람"이라며 "필드 밖에서 가족 외에 저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리디아 고는 인터뷰 이후 두바이로 향했다.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 아람코 사우디 레이디스 인터내셔널(총상금 100만 달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해 이 대회 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000여명의 소녀들이 골프를 배우려고 등록했다고 들었다. 골프로 세계의 더 많은 소녀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LPGA 투어의 올 시즌 마지막 2개 대회로 그 어느 때보다 빛났던 2021년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리디아 고는 현재 LPGA 투어 최저타수 1위 '베어 트로피'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국적은 뉴질랜드이지만 한국은 언제나 저에게 특별한 곳이다. 팬들께서 보내주시는 지지는 큰 힘이 된다"며 "항상 뉴질랜드와 한국 모두를 대표하며 뛰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좋은 기억이 많았던 올 시즌을 좋은 성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