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도 수출코드도 못 받는 '소·부·장 혁신'

입력 2021-11-02 17:28
수정 2021-11-12 16:03
탄소나노튜브 장비업체인 어썸레이는 인증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회사의 간판 제품은 탄소나노튜브에서 뽑아낸 실을 광원 핵심부품으로 쓰는 극자외선(EUV) 공조장치 ‘에어썸’이다. 공기 중에 빛을 쏴 세균과 미세먼지를 없앤다. 필터나 냉각장치가 필요 없어 친환경적이고 공간도 덜 차지하는 혁신 제품이지만 인증이라는 벽에 막혀 판로를 뚫지 못하고 있다.

‘인증 규제’에 발목 잡힌 혁신2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판매와 수출에 필요한 인증 기준이 기존 제품에 맞춰진 탓에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낡은 인증 제도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의 혁신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썸레이가 만든 에어썸도 국내에선 필터를 쓰는 장비만 공조장치로 인정한다는 ‘인증 규제’에 막힌 대표적인 경우다. 평가기관인 생산기술연구원 등이 필터가 미세먼지를 얼마나 막아내는지 측정해 인증을 내주기 때문이다. 건축법 등 현행법상 공공기관은 공식 인증을 받은 제품만 쓸 수 있다. 필터 없이 미세먼지를 제거하는 획기적 제품은 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현재 이 회사의 장비를 도입한 국내 업체는 삼성전자 등 소수에 불과하다. 삼성전자는 자체 테스트 설비를 통해 에어썸의 품질을 확인한 뒤 반도체 라인에 설치했다. 회사 관계자는 “그나마 공공기관과 달리 민간기업은 자체적으로 제품의 효능을 검증해 쓸 수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가 제품 사용을 승인했다는 것 자체가 현행 인증 규제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썸레이는 국내에서 판로를 뚫는 게 녹록지 않다고 판단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인도네시아 대형 병원과 납품 계약을 맺는 데 성공했지만 이번엔 품목 분류 코드 때문에 진땀을 뺐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공기정화 장치여서 딱 맞는 코드를 찾기 어려웠다. 결국 어썸레이는 부품을 수출한 뒤 현지에서 조립해 납품하기로 했다. 김세훈 어썸레이 대표는 “빛으로 물을 살균하는 장치도 개발했지만 국내 인증을 받기 위해 불필요한 UV 살균 기능을 추가했다”며 “국내에서는 UV 장치가 있어야 인증받을 수 있다”고 토로했다. 규제 차별로 공장 신설 불허 날벼락외국 기업과의 역차별로 공장 신설이 막힌 경우도 있다. 반도체용 소재 기업인 램테크놀러지는 300억원을 투입해 충남 당진 국가산업단지에 액화불화수소 공장을 짓기로 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국산화가 시급한 품목이었다. 이를 통해 월 생산능력을 2100t에서 1만3000t으로 늘리는 게 당초 계획이었다.

올 8월 날벼락이 떨어졌다. 당진시가 공장 건축 불허 결정을 내렸다. 화학물질 누설 사고를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 당진시가 올초 일본 전범기업 다이킨과는반도체 제조용 가스 공장 신설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액화불화수소와 품목이 달라 기준도 다르게 적용한다는 게 당진시 측 설명이다. 램테크놀러지는 결국 지난달 시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각종 허가 절차가 연구개발(R&D)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반도체 장비업체인 주성엔지니어링은 임직원의 70%가량이 R&D 인력일 정도로 연구개발에 매진한다. 최고경영자(CEO)인 황철주 회장도 다수의 특허를 보유한 엔지니어다. 하지만 신소재를 개발할 때 쓰이는 화학물질 허가 절차에 석 달이 걸려 기술개발이 늦어지고 있다. 황 회장은 “화학물질 하나를 허가받을 때마다 3개월이 걸리는 상황에선 기술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연구용 화학물질 사용을 빠르게 허가하는 ‘패스트트랙’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부처 간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국내 기술 스타트업 관계자는 “발명왕 에디슨도 한국에선 인증에 가로막혀 사업을 접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규제 장벽이 높다”며 “낡은 인증 제도가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혁신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