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뱅크그룹이 운용하는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VC) 비전펀드가 2017년 출범 이후 처음으로 일본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경제규모에 비해 신생아 수준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일본의 벤처 시장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비전펀드 2호가 일본의 바이오 스타트업인 애큐리스파머에 68억엔(약 724억원)을 투자했다고 29일 보도했다. 2017년과 2019년 각각 1000억달러(약 115조원) 규모로 출범한 비전펀드 1,2호는 지금까지 세계 186개 회사에 투자했지만 일본 기업에 투자한 적은 없었다.
쿠팡(전자상거래·3조3000억원)과 아이유노(번역 및 자막·1800억원), 뤼이드(AI 교육·2000억원), 야놀자(2조원) 등 4개의 한국 기업이 투자를 받은 것과 대조적이다.
애큐리스파머는 노바티스제약 일본 법인 사장 출신인 쓰나마 가즈나리(사진)가 올 1월 설립한 신생 벤처기업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제조판매가 승인된 수면장애 치료약을 일본에서 임상실험하고 판매하는 회사다. 해외에서 이미 유통되는 의약품을 일본에서 판매하는 안정적인 사업모델이 투자 유치 비결로 분석된다.
일본 벤처업계가 비전펀드의 자금을 유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도 첫 일본 투자가 성사된 배경으로 꼽힌다. 일본의 벤처업계 규모는 세계 3대 경제대국에 걸맞지 않는 수준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스타트업의 숫자가 적을 뿐 아니라 벤처기업이 투자 1건으로 조달하는 금액 역시 평균 5억엔에 불과했다. 미국은 건당 2500만달러 이상인 벤처투자가 전체의 60%를 넘는다. 지난해 일본의 전체 벤처투자 규모도 21억달러로 중국의 30분의 1 수준이었다.
반면 비전펀드 1호는 투자 1건당 최소 투자금액이 1000억엔 이상이어서 일본에는 투자를 받을 만한 스타트업 자체가 없었다. 2호펀드는 위험 분산 전략의 하나로 최소 투자금액을 250억엔으로 낮췄다. 덕분에 1호펀드가 주로 투자했던 미국과 중국 기업 외에 유럽과 중동,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도 투자를 늘릴 수 있게 됐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비전펀드의 투자대상이 될 만한 급의 대형 스타트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최근에는 글로벌 VC가 일본 스타트업에 100억엔 이상을 투자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지난 9월에는 미국 결제서비스 회사 페이팔이 일본의 결제서비스 스타트업인 페이디를 3000억엔에 인수했다.
일본의 스타트업이 기지개를 켜자 비전펀드도 일본 투자 담당자를 늘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최대 VC가 일본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일본의 벤처업계가 도약할 기회를 맞았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분석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