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핌 리센코는 20세기 가장 악명 높은 과학자다. 20세기 중반 소련 생물학계를 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의 비호 아래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비롯해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과학자들을 숙청했다. 그런데 최근에 리센코가 옳았다는 주장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숙청이 옳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획득형질 유전설’이 옳았다는 것이다.
《리센코의 망령》은 ‘리센코가 옳았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 생물계의 상황, 후성유전학의 전통, 리센코의 이론, 소비에트 과학계의 모순, 현재 러시아의 실상을 폭넓게 조망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리센코 현상’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리센코 현상에 숨어 있는 디테일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리센코는 당시 서방에서 주류를 이루던 다윈주의 유전학을 거부하고 획득형질도 유전된다는 일종의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였다. 다윈주의 유전학에서는 획득형질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서방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는 틀린 이론을 붙들고 자국의 과학계를 좌지우지한 리센코가 공포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획득형질이 유전되는 것으로 보이는, 후성유전학으로 설명해야 할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리센코가 정치적으로는 ‘나쁜 과학자’였을지 몰라도 ‘틀린 과학자’는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리센코와 관련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의미 또한 매우 중층적이다. 현재 러시아 내 극우 공산주의 성향의 세력은 리센코를 복권시켜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스탈린 시대의 향수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알고 보니 리센코가 옳았고, 리센코에 힘을 실어줬던 스탈린 체제도 옳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러시아 주류 유전학계에서는 리센코가 옳았다는 결론을 지지하게 될까 봐 후성유전학 연구를 기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리센코 현상은 정치와 과학의 관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공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셈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