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억원. 신형 자동차 모델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적으로 드는 비용이다. 이 중 적지 않은 액수가 수십~수백 대의 시제차를 제조하는 데 쓰인다. 만족할 만한 성능과 내구성을 확보할 때까지 시제품을 통해 부품 구조와 재질, 무게 등을 계속 바꿔가며 시험을 거듭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최근 싱가포르 현대모빌리티글로벌혁신센터(HMGICS)에 디지털트윈을 도입하기로 한 건 이 부분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다.
디지털트윈은 가상공간에 현실세계의 자동차와 쌍둥이처럼 닮은 모델을 만들어 시뮬레이션하고 얻은 데이터를 개발과 생산 과정에 활용하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시제차 수를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표만큼이나 쏠쏠한 부가 효과도 거두게 됐다. 설계와 시작(試作), 시험 단계에서 배출되는 폐기물과 이산화탄소를 대폭 절감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글로벌 기업들의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이 ESG 경영 강화와 사회적 가치 창출로 이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 선두엔 전자·제조·물류기업들이 있다. LG전자는 미국 테네시에 있는 세탁기 공장에, LG디스플레이는 베트남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모듈 공장에 디지털트윈 기반 공정 자동화 시스템을 들였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ESG와 디지털 전환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관계”라며 “디지털트윈으로 공정 개선 과정의 시행착오를 줄여 생산성이 오르면 탄소 및 폐기물 배출, 에너지 사용량은 필연적으로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올초 글로벌 컨설팅기업 액센츄어는 건설, 전기전자, 소비재, 교통, 생명과학 5개 분야에서 디지털트윈 방식이 확산되면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이 7억5000만t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적인 예가 글로벌 제약사 사노피다. 이 회사는 미국 프레이밍햄 생산설비에 디지털트윈 기술을 적용해 연간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량을 약 80% 줄였다. 화학물질 사용량은 94% 감소시켰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탄소국경세 도입을 속속 추진·검토하면서 탄소 저감을 위한 기업들의 디지털 전환 필요성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EU는 ‘그린딜’ 계획에 따라 2023년부터 고탄소 수입품에 추가 관세 등의 비용을 부과하는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다. 미국도 이 제도의 도입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디지털 전환의 산물이 일반적 사회공헌 활동보다 훨씬 큰 성과를 가져오는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가 가상현실(VR)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발한 저시력자 보조 기술 ‘릴루미노’는 지난 5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안과학 진료형 소프트웨어(SW)로 품목허가를 받으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 품목으로 보건당국 허가를 받은 건 릴루미노가 처음이다. 빛이나 사물을 전혀 지각하지 못하는 전맹(全盲)을 제외한 시각장애인은 릴루미노와 VR 기기를 사용해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