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협의회 신설로 지속가능경영 추진', 'ISMS 인증 토대로 ESG 경영 속도' '전기차 도입으로 ESG 경영 실천', '페이퍼리스 문화 확산으로 ESG 가치 실현' 'ESG 경영 일환 ○○공모전 진행' 등.
작년 말부터일 겁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나서겠다는 힘찬 포부의 기업 보도자료들이 기자의 메일함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은 ESG 전담 조직을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 조직을 그에 맞게 개편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잔반 줄이기나 종이 절감 캠페인을 여는가 하면 비대면으로 물품을 기증했다는 소식조차도 ESG와 연결짓는 곳도 있었습니다.
산업계 전반이 모든 화두를 ESG로 풀어내면서 이른바 '그린워싱(ESG워싱)'의 우려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린워싱이란 기업이 홍보와 마케팅만으로 'ESG 친화적 기업'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을 뜻합니다. 가짜 친환경 기업이 양산될 수 있단 얘기입니다. 이를 경계하려면 기업이나 상품이 실제로 ESG 요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당초 발표한대로 계획을 이행했는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평가·자문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오랜 기간 자리를 지켜온 데이터 평가기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ESG 분야 자체가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했기 때문에 ESG 평가시장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이런 가운데 투자자 측면에서 이들 평가기관의 문제점과 개선점을 짚은 논문이 최근 발표됐습니다. 지난달 한국상사판례학회가 발행한 50쪽 분량의 논문 입니다.
'1강 2중' ESG 평가시장…신규진입 제한·이해상충 문제 대두아직 ESG 평가시장 규모를 가늠할 만한 공식 통계자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국내에 알려진 주요 ESG 평가기관은 크게 3곳입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이 시장 선두에 있고 대신경제연구소와 서스틴베스트가 그 뒤를 잇는 '1강 2중' 구도입니다.
이 중 KCGS는 2003년부터 기업지배구조 평가를 시작해 2011년 ESG 분야로 그 범위를 넓혔습니다. KCGS는 금융위원회 인가 비영리사단법인인 만큼 거래소와 예탁결제원 등 사원기관으로부터 받는 기부금이 주 수익원이고 ESG평가 등급 서비스를 통해 거두는 수익은 전체의 6%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서스틴베스트는 2015~2019년 4년간 국민연금에 ESG 평가 데이터를 제공했고 그 바통을 이어 받은 대신경제연구소가 작년부터 국민연금의 ESG 모델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논문은 이들 ESG 평가기관이 여전히 규제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어 투자자 보호가 미흡한 실정이라고 지적합니다.
지배구조로 인한 이해상충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ESG 평가기관의 지배주주가 법인이나 투자자인 경우 평가기관이 해당 회사에 긍정적인 평가를 줄 우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신경제연구소는 모회사인 대신증권에 대해 ESG 평가를 할 때 이해상충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평가기관의 전현직 임원이 평가대상회사의 임원을 겸직하는 경우도 같은 맥락입니다.
정부기관과의 이해상충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최근 ESG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정부기관 중 일부는 ESG 평가기관에 연구용역을 맡기고 있습니다. 이는 해외에선 찾아볼 수 없는 사례입니다. 정부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용역을 ESG 평가사에 맡기게 되면 해당 정부기관 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방안은 용역을 수행한 평가기관의 평가모형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수립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용역을 수행한 것 자체가 이해관계를 만들어서 용역 수팽 평가기관이 향후 해당 기금의 ESG 서비스 구독 입찰에 유리한 입지를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논문은 시장 구조의 고질점도 꼬집었습니다. 해외 ESG 평가사들이 활발한 인수·합병을 통해 대형 영리법인과 중소 규모의 전문성 있는 기관으로 시장을 재편성 중인 반면 국내는 일부 평가기관이 장악 중이며 평가기관 간 인수 가능성이 적습니다. 평가 역량 혁신과 신규 사업자의 진입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가기관이 제공하는 데이터의 정확성과 투명성을 입증할 수 없는 점도 업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입니다. 해외 대부분의 평가기관들은 데이터 수집직원과 별도 데이터 애널리스트를 두고 데이터 수집·확인 등과 관련한 절차별 통제방안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평가사 중 데이터 검증과 내부통제 절차를 공개한 곳은 없습니다.
"제도권 밖의 ESG 평가기관…끌어와야 건전한 시장 성장 가능"논문을 작성한 장윤제 박사(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민간전문가)는 ESG 평가 업계를 규제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급선무라고 말합니다. 먼저 자율적인 측면에선 ESG 평가기관이 평가자로서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꾸려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해상충 사안을 감독하기 위한 감사나 준법감시인 등을 선임해 준법감시체계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주요 ESG 평가사 중에선 KCGS만 준법감시인을 두고 있습니다.
입법적인 측면에선 자본시장법상 ESG 평가기관의 정의를 명확히 해서 규제체계로 포섭하는 방안이 제시됩니다. ESG 평가기관은 금융투자업자의 일환으로 '투자자의 투자의사결정을 위해 금융상품의 ESG 정보를 제공하는 기관'이라 규정될 수 있을 겁니다. 최근 산업계 일각에서 모든 비재무적 요소를 ESG로 확장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만큼 용어 사용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게 장 박사의 설명입니다. 그는 평가방법론과 내부통제 정책 공시를 의무화해 투자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도 강조했습니다.
특히 그는 금융협회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대부분의 금융사는 은행연합회, 금융투자협회, 여신금융협회, 신용정보협회 등 금융당국의 설립 인가를 받은 금융협회에 속해 있습니다. 평가기관들도 협회를 꾸려 당국에 공식 등록하고 지배구조와 내부통제를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 박사는 21일 기자와 통화에서 "ESG는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이니셔티브로 인식돼 왔지만 결국 금융투자업과 자본시장의 영역"이라며 "ESG 평가기관으로서 사업자 등록을 하게 하고 규제당국으로부터 감독, 검사를 받게하는 것이 향후 시장을 건강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물론 협회를 만들게 되면 해외 평가사에 대해선 역차별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면서도 "업계를 제도권으로 포섭하되 시장 상황을 봐가면서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